'제8회 세계바둑오픈' - 20의 신수에 담긴 조치훈의 바둑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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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제8회 세계바둑오픈 준결승 제1국
[제2보 (20~23)]
白.趙治勳 9단 黑.胡耀宇 7단

흑▲로 밀어온 장면에서 조치훈의 원초적 고민은 계속된다. 전보에서 설명한 대로 23자리에 단수하는 것은 흑에 큰 세력을 허용해 피곤해진다. 그렇다면 부득이 '한국류'를 따를 것인가.

한국류라 함은 '참고도' 백1로 가만히 느는 수를 말한다. 그때의 결론은 흑8까지. 백은 두텁게 자리를 잡으며 흑의 대세력을 막아냈고 흑은 우상과 우하를 동시에 두어 만족이다.

趙9단도 이 결말에 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참고도' 백1이 초반에 패망선으로 가지 말라는 일본의 전통적인 기리(棋理)에 정면으로 어긋난다는 데 있다.

여섯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40여년간 이 기리에 단련되어온 조치훈이다. 돌의 형태와 미적 감각, 그리고 돌의 효율을 중시하는 일본 바둑에서 '참고도' 백1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변칙이자 일탈인 것이다.

조치훈은 번민한다. '참고도' 백1은 그의 바둑관에 위배된다. 그러나 이 수는 이창호.이세돌같은 바둑계를 호령하는 젊은 호랑이들이 즐겨 쓰는 매우 실전적인 수다. 제3의 길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안은 여간해서 보이지 않는다.

백20의 신수는 이 같은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혼신의 노고가 깃들인 이 수는 조치훈의 뼈저린 자존심을 보여준다. 그는 끝끝내 '참고도' 백1에 동의하지 않고 독창적인 길을 갔다. 이게 조치훈식 예도일까. 성패를 떠나 의미있는 한수였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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