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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대형 할인점-영세 소매점, 상생의 길은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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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지난달 29일 열린 KDI 국제정책대학원-중앙일보 공동 주최 갈등 조정 포럼에서는 대형 할인점 영업규제에 대해 논의했다. 왼쪽부터 이수동 국민대 교수, 이정희 중앙대 교수, 박진 KDI 교수(사회), 이시종 열린우리당 의원, 김경배 대형유통점 저지 위원장. 김성룡 기자

대도시는 물론 지방 중소도시까지 진출한 대형 할인점이 재래시장, 영세 소매점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대형 할인점은 연 면적 3000㎡ 이상의 대형 소매점을 말한다. 1996년 유통시장이 처음 개방됐을 당시에는 26개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342개로 늘었다. 매출액도 2000년 10조5000억원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25조4000억원에 달했다. 관련해 영세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형 할인점의 영업시간과 취급 품목을 제한하는 법안이 마련돼 국회에 상정된 상태다. 이에 대한 대형 할인점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29일 열린 KDI 국제정책대학원-중앙일보 공동 포럼에서는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대형 소매점과 영세 소매점 간의 상생을 위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1) 할인점이 재래시장 위축시키나

김경배 위원장이 포문을 열었다. 김 위원장은 “대형 할인점의 연 매출은 평균 800억원 가량”이라며 “대형 유통점이 지방 도시에 2~3개 정도 입점하면 지방 중소상인들의 매출 감소는 연 2000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통산업이 크기가 정해져 있는 파이를 나눠먹는 제로섬 게임과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또 “현재 유통업에 종사하는 중소 상인들의 70% 이상이 영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수퍼마켓의 경우 최근 10년 만에 2만 개 정도가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수동 교수는 재래시장과 지방 상권의 위축을 대형 할인점의 탓으로만 돌리는 건 무리라는 의견을 내놨다. 이 교수는 “대형 할인점이 재래시장에 타격을 준 것은 사실” 이라며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 유통산업의 구조적 변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선진국 소비자일수록 쇼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구매 형태도 빈도를 줄이면서 한 번에 대량 매입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또 소비자들이 일괄구매를 선호하기 때문에 쇼핑을 위한 이동 거리가 멀더라도 이를 감내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고 덧붙였다.

이정희 교수도 이를 거들었다. 이 교수는 “재래시장의 위축은 대형 할인점 외에도 다양한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경기침체로 인한 소비위축, 중소 상인들의 과잉 점포, 온라인 상거래 활성화, 편의점 등 기업형 프랜차이즈의 확산 등도 재래시장을 압박하는 요인들로 지적했다. 이시종 의원은 “두 교수의 의견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한다”면서도 “재래시장과 소상인들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이 대형 할인점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규제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2) 할인점 영업규제가 재래시장을 보호하나

이정희 교수는 대형 마트와 할인점을 규제하는 이번 법안은 재래시장의 위축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지 못했기에 정책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 교수는 “대형 할인점의 영업시간을 오후 8, 9시로 제한한다면 당장은 소비자가 줄어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줄어든 영업시간에 적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소비자들이 쇼핑시간대를 앞당겨 대형 할인점 영업시간 제한이 재래시장에 대한 혜택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또 대형 할인점의 판매 품목을 규제하는 것도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판매 제한 품목을 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는 또 대형 할인점의 입점을 제한하게 되면 이미 영업하고 있는 업체에 독점적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지적도 했다.

이수동 교수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 교수는 “대형 할인점의 영업 규제가 자칫 소비 위축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며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걱정했다. 그는 백화점 셔틀버스 운행을 중단시켰을 때도 교통량만 증가하는 등 사회적 부담이 늘어난 과거 사례를 상기했다.

그러나 이시종 의원은 “지난해 말 대형 할인점 324개 중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은 60곳 정도”라며 “이들 할인점의 전체 매출 중 오후 9시에서 다음날 오전 9시까지의 매출 비중이 20.9%에 달한다”고 소개했다. 이 의원은 “2005년의 대형 할인점의 전년 대비 매출 증가액은 재래시장 152개의 총 매출액과 엇비슷하다” 며 “올해 영세 점포 수가 지난해에 비해 1만3400개 정도 줄어든 것이 대형 할인점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경배 위원장은 셔틀버스 운행 중단이 중소상인들에게 또 다른 희망을 던져줬다고 반박했다. 그는 “당시 셔틀버스 운행 중단으로 중소상인들도 해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며 “대ㆍ중ㆍ소형 점포들이 상생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형 할인점의 24시간 영업을 규제하면 재래시장 상인들이 24시간 영업을 해서라도 틈새시장을 개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3) 할인점 영업규제가 소비자 주권 뺏나

김경배 위원장은 중소 점포들의 품목별 소량 판매가 소비자들의 충동 구매를 막을 수 있어 오히려 소비자 주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형 유통업체들이 해외 진출보다는 국내에서 지나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 위원장은 “국내 대형 할인점의 적정 영업점 수는 200~250개가량”이라며 “하지만 현재 300개가 훨씬 넘는 점포가 영업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글로벌화를 꾀하기보다는 국내에서 과잉 경쟁을 하는 것은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시종 의원도 이에 동의했다. 이 의원은 대형 할인점의 다양한 상품 구비가 충동구매를 조장해 소비자 주권을 훼손하고 있다고 봤다. 그는 또 “중소 유통점과 재래시장의 붕괴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사회 안전망 붕괴로 이어져 국민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며 “이럴 경우 유통산업의 선진화는 요원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수동 교수는 재래시장이나 지역 상권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동의하면서도 “하지만 규제를 통해 소비자들의 선택 기회를 제한하는 것이야 말로 소비자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대형 할인점 규제에 대해 중소 상인들은 환영하겠지만 소비자들의 불편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국내 대형 할인점들은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며 “유통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재래시장 못지않게 대형 유통업체도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희 교수는 지역 소비자들도 대형 할인점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강조했다. 지역 소비자들이 대형 할인점의 다양한 상품, 서비스, 편리성 등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소비자들에게 시간적·장소적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유통의 목적”이라며 “대형 할인점 규제는 이 소비자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형 할인점에서의 불필요한 충동 구매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상권별 판매행사 함께 열고

시장 빈 점포에 공동매장도

상생의 길은

토론자들은 모두 대형 할인점과 재래시장ㆍ중소상인들이 상생하기 위해 시장 논리로만 이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이수동 교수는 “우리나라의 중소 유통점들은 실업 등을 해결하는 사회 안전망의 한 축”이라며 “이 때문에 대형 할인점과 중소상인들의 상생을 위한 협력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이 도심 재개발 등과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계천 정비로 인해 인근 상권이 살아나듯이 부동산 개발을 통해 재래시장을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또 통합 브랜드를 만들어 현재 독립 생계형인 재래시장이 경쟁력 있는 기업형으로 변신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제안도 했다.

이시종 의원은 환경ㆍ교통 영향평가와 유사한 유통영향 평가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재래시장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상인들의 자체 노력과 함께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도 절실하다고 했다. 그는 재래시장 상인들에 대한 지원이 지금까지 고작 1조원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 의원은 재래시장의 과잉 점포를 줄이고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대폭 늘리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경배 위원장은 대형 할인점, 중소 유통점, 재래시장이 참여하는 ‘지역상권 활성화 협력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했다. 김 위원장은 “이를 통해 공동 판촉행사나 이벤트 등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며 “특히 재래시장의 빈 점포를 대형 할인점과 공동 매장을 운영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또 수퍼마켓의 시설 현대화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정희 교수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상생 모델이 없는 것이 아쉽다”며 “미국처럼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접근성이 용이하도록 무료 교통수단을 마련하는 등 인프라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참석자

사회: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김경배 대형유통점 및 SSM 확산저지 비상대책위원장

이수동 국민대 경영대 교수

이시종 열린우리당 의원

이정희 중앙대 산업경제학과 교수(가나다 순)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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