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반도체 전쟁으로 본 ‘삼성 위기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중앙SUNDAY

“D램 가격이 바닥을 쳤다고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지난달 26일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사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국회에서 열린 포럼에 참석했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였다. 오랜만의 발언치고는 극히 신중했다. 올 들어 반도체 부문의 실적이 추락하면서 황 사장은 바깥 나들이를 줄였다. 대신 기흥공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었다. 일부에선 ‘황의 침묵’ 이라는 말이 나왔다. 메모리 기술의 발전공식이 된 ‘황의 법칙’에 빗댄 표현이었다.

다음 날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계열사별로 인력 재배치와 사업 조정에 착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반도체 부문, 삼성SDI 등 일부 계열사의 실적이 부진한 데다 고유가와 환율하락 등 경영환경이 불확실하다는 판단에 따라 계열사별로 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침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내에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반도체 부문이 한순간에 ‘부진한 계열사’로 추락하는 순간이었다. 올 들어 삼성전자는 이런 ‘굴욕’을 수차례 겪어야 했다. 주가지수가 1800포인트를 돌파하는 순간에도 삼성전자의 주가는 뒷걸음쳤다. 반도체와 휴대전화, 액정표시장치(LCD) 등 ‘삼각편대’의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을 이끌 신사업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시장의 불만이다.

■예전만 못한 시장 주도력=반도체의 위기는 곧 삼성전자의 위기다. 반도체는 매출 비중이 클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삼성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상품이다. 하지만 근래 삼성이 시장을 주도해가는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산업연구원 주대영 연구위원은 “후발업체들이 급격히 성장하고 업체 간 제휴를 통해 몸집을 불린 것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전형적인 자본집약형 산업이다. 업체 간 경쟁도 포커게임을 연상시킨다. 돈이 많아 투자와 개발 여력이 있는 기업일수록 유리하다. 황 사장의 말을 빌리면 “1등이 다 먹는 사업”이다. 이런 경쟁구도 덕에 삼성은 1992년 메모리 업계 1위에 올라선 이후 15년간이나 왕좌를 지켜왔다. 정보기술(IT) 거품으로 경쟁업체들이 쓰러지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는 거의 독주체제였다. 메모리 업계에서 ‘세계 최초’는 언제나 삼성의 차지였고, 후발업체들은 삼성의 눈치를 봤다. “반도체 집적도가 1년에 2배씩 늘어난다”는 ‘황의 법칙’이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가 내세웠던
‘무어의 법칙’을 대체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하지만 2004년부터 시작된 메모리 업계의 ‘3년 호황’이 이런 구도를 바꿔놨다. 이 시기 PC에 들어가는 D램은 물론 MP3ㆍ디지털카메라용 플래시메모리의 수요는 말 그대로 폭발했다. 가장 큰 수혜자는 삼성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경쟁업체들도 되살아났다. 판돈이 두둑해진 업체들은 저마다 대규모 투자에 나섰다. ‘윈도비스타’ 출시로 D램 수요가 크게 늘 것이란 기대도 한몫했다. 하지만 예상만큼 수요가 늘지 않은 상황에서 공급이 급증하자 올 들어 D램 가격은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여전히 삼성이 기술주도권을 갖고 있지만 격차는 줄어들고 있다. 주 연구위원은 “D램 시장의 경쟁이 격화되자 삼성이 비중을 늘려간 게 낸드플래시”라면서 “하지만 낸드플래시는 D램보다 투자비나 공정 수가 적어 후발업체들의 추격속도도 그만큼 빨라졌다”고 말했다.

■장기전 돌입=“이 정도로 끝날 싸움이 아니다. 하위 업체들이 견디다 못해 투자를 줄이는 시점이 본격적인 전환기가 될 것이다.”

메리츠증권 이선태 선임연구원의 장기 전망이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라는 것이다. 삼성을 포함한 메모리 업체들이 출혈경쟁을 자제하면서 최근 D램 현물 가격은 반등했다. 하반기 이후부터는 수요에도 다소 숨통이 트일 것이란 전망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회복기가 늦춰진다면 업계의 구조조정으로 끝을 볼 가능성이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살림이 넉넉할수록 한파에도 오래 견디는 법이다. 이 연구원은 “선도업체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삼성이 이 상황을 즐기는 면도 없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 사장도 최근 “5년 뒤쯤에는 확실한 기술력을 가진 업체만 생존하고 그렇지 못한 다수 업체는 도태하는 대지각 변동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올 1분기 삼성은 반도체에서 17%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반면 일본 엘피다는 10.3%, 독일 키몬다는 8.6%에 그쳤다. 미국 마이크론은 2분기 연속 적자를 냈다. 2분기에는 삼성전자를 제외하고 모두 적자로 돌아설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황 사장도 “2분기 실적이 발표되면 경쟁력 있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이 구분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위 업체들이 당장 두 손을 들고 나오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다. ‘학습효과’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 업체들이 불황기에 투자를 머뭇거리다 삼성에 추월을 허용했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1995년만 해도 세계 10대 반도체사에는 NECㆍ히타치ㆍ도시바 등 5개 일본 업체가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엘피다ㆍNEC 정도만 톱10에 살아남았다. 이 때문에 D램 가격이 원가 수준으로 떨어져도 투자를 줄이겠다는 업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과정을 연상시키는 상황이다. 다른 산유국들이 움직이지 않는데 먼저 감산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지루한 장기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GE 코스’냐, ‘소니 코스’냐=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도 이런 혈전이 벌어졌었다. 압도적 1위 기업인 인텔과 AMD의 경쟁은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인텔은 고상한 프리미엄 전략이 아닌 ‘진흙탕 싸움’을 택했다. 수익성을 희생하면서까지 수년간 치열한 가격인하 경쟁을 벌였고 AMD를 코너에 몰았다.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게 IT시장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도 지난 4월 기업설명회에서 “저가 시장을 놓치면 다른 시장도 잃어버릴 수 있다”며 시장 방어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시장은 경쟁이 격화된 레드 오션으로 변하고 있다. 수익성이 크게 악화된 D램의 경우 수년 내에 주도권이 대만ㆍ중국 업체로 넘어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삼성이 대대적으로 신성장동력 찾기에 나선 것도 근본적인 돌파구 마련을 위한 조치다.

대응이 한 발 늦었다는 비판도 여기저기서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이 스스로 쳐놓은 기술의 틀에 갇혀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간 기존 제품의 개선에 주력한 나머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할 제품 개발 노력은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들도 대안이 뭐냐는 물음에는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황의 법칙’으로 새로운 경쟁의 구도를 제시한 것처럼 이를 뛰어넘는 것도 결국 삼성전자의 몫이다. 미국의 GE는 이런 혁신과 끊임없는 사업 포트폴리오 재창출로 100년간 선도기업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일본의 소니는 기술이라는 ‘나무’에 매달려 시장이라는 ‘숲’을 보지 못했다. GE의 코스를 따라갈지, 소니의 코스를 밟을지 ‘거함’ 삼성전자가 갈림길에 서 있다. 

조민근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