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연철의 BT 이야기] 로렌조 오일과 젠자임의 성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호 27면

약이 없다. 치료 방법도 없다. 의사들은 기껏해야 2년 정도 살 수 있을 뿐이라며 고개를 흔든다. 이제 다섯 살 난 아이의 뇌가 2년에 걸쳐 서서히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뇌가 죽어간다는 것은 장기에 대해 통제력을 잃어 그 기능이 멈추게 됨을 의미한다. 과학계는 이 희귀한 질병을 이제 막 발견했을 뿐이며, 모계를 통한 유전병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희귀한 질병, 아이는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은행 간부인 오도네와 미켈라 부부는 다섯 살 난 아들 로렌조가 ALD(부신백질이영양증, 흔히 로렌조오일병이라 불림)이란 생소한 이름의 유전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된다. ALD는 체내에서 분해돼야 할 지방산이 분해되지 못하고 축적돼, 대뇌를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질병이다. 로렌조가 발병할 당시만 해도 ALD는 병명만 겨우 알려져 있을 정도로 생소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부모는 직접 논문을 보고 생화학 서적을 읽으며 약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야말로 ‘투쟁’을 벌였다. 결국 부모는 나중에 ‘로렌조 오일’ 이라 불리게 된 의약품을 발견한다. 아이의 생명은 연장된다. 1993년 배우 수전 서랜던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로렌조 오일’은 희귀 질환에 걸린 아들을 치료하기 위한 부모의 눈물겨운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 39로렌조 오일39 포스터

젠자임(Genzyme)은 희귀 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세워진 바이오텍 기업이다. 설립자는 미국 국립보건원 연구원인 브래디라는 과학자였다. 그가 주목한 질환은 ‘고셔 병’으로 전 세계 환자가 1만 명 정도인 희귀 유전병이었다. 고셔 병 역시 ALD와 마찬가지로 특정 분해효소가 유전적으로 결핍돼 나타나는 질환으로, 뼈에 이상이 생기고 각종 장기가 확대되는 건 물론 심하면 중추신경계가 손상돼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브래디는 고셔 병에 관련된 미지의 분해효소를 최초로 발견했고, 이 단백질을 환자에게 직접 주사하는 치료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환자의 몸에 주사할 만한 충분한 양의 고순도 단백질이 필요했다. 그것도 환자의 체내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다시 말해 사람의 조직에서 추출한 단백질이 필요했다. 브래디와 그의 동료들은 출산 뒤 폐기되는 인간의 태반을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단백질의 정제를 시작했다. 결국 9년이 지나서야 고순도 단백질 정제에 성공할 수 있었고 브래디는 임상시험을 거쳐 미국 식품의약국의 시판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오늘의 젠자임을 있게 한 ‘세레데이즈’라는 고셔 병 치료제다. 브래디가 효소를 발견하고서도 무려 27년 만의 일이었다.

희귀하다는 것은 한편으론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제약회사들은 수천억원이 소모되는 신약 개발 비용을 희귀한 숫자의 소비자를 위해 지출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정부 역시 암ㆍ당뇨ㆍ심장병과 같은, 보다 많은 수의 환자가 기다리고 있는 연구에 지원하려 한다. 그러나 로렌조 부모나 브래디 같은 과학자는 도전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 결과 젠자임은 오늘날 3조원의 매출과 2조원이 넘는 이익을 내는 희귀의약품 전문회사가 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일곱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로렌조가 올해로 만 29세의 청년이 됐다는 사실이다.

나노엔텍 이사ㆍ분자생물학 박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