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 없는 도청 자료' 놓고 부시·의회 대립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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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영장 없는 도청 문제와 관련, 의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는 백악관과 딕 체니 부통령실에 관련 자료를 제출하라는 상.하 양원 법사위원회의 요구를 29일 대통령의 '행정특권(executive privilege)'을 내세워 거부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소속 패트릭 레히 상원 법사위원장은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을 은폐하려 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방해 행위"라고 비난했다.

프레드 필딩 백악관 법률고문은 양원 법사위에 보낸 서한에서 "의회의 요구에 대해 행정특권을 발동하겠다"고 통보했다. 또 해리엇 마이어스 전 대통령 법률고문과 새러 테일러 전 백악관 정치국장의 의회 증언 요구도 행정특권으로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행정특권은 의회.대법원 등 다른 권력기관의 자료 제출.증언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말한다. 필딩 고문은 이 권한에 대해 "대통령이 헌법상 의무를 이행하려면 백악관 보좌진과 행정부 안팎의 여러 사람에게서 솔직하고 자유로운 의견을 듣고 토론하는 게 긴요하다"며 "대통령이 그런 대화를 의회에 밝히도록 강제로 요구받는 상황에서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행정특권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2001년 12월 공화당이 주도한 의회가 민주당 소속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의 행정부 자료들을 제출하라고 요구하자 행정특권을 발동해 거부한 바 있다. 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행정특권은 1974년 닉슨 당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관련해 측근의 녹음테이프 등 각종 자료를 제출하라고 한 대법원의 요구를 거부한 경우다.

토니 스노 백악관 대변인은 의회의 영장 없는 도청 프로그램에 대한 자료 제출 요구에 대해 "단순히 백악관을 애먹이기 위한 것이 목적인 부당한 요구"라고 반박했다.

양원 법사위가 자료 제출 시한으로 설정한 이날 백악관이 의회의 요구를 거부하자 민주당은 강력히 반발했다. 레히 상원 법사위원장은 "대통령과 부통령은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야유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진실을 알기 위해 필요한 추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존 코니어스 하원 법사위원장도 "부시 대통령의 행정특권 주장은 국민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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