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 뜨거운 대선비용 보고(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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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선거가 끝나면 으레 있게 마련인 껍데기의 요식행위가 이번에도 되풀이되었다. 각 대선후보들은 법에 따라 이번에도 이른바 선거비용지출보고서라는 것을 선관위에 제출했지만 그 내용이 정직하다고 믿는 사람이 해당 후보진영을 포함해 국민중 몇사람이나 될는지 의문이다.
선관위가 다분히 비현실적인 기준으로 산정한 법정비용한도가 3백67억원이었는데 주요 3당이 보고한 지출비용은 모두 이 법정한도에도 훨씬 미달했다. 김영삼후보는 2백85억원,김대중후보는 2백7억원,정주영후보는 2백20억원을 썼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선관위의 법정한도를 훨씬 초과할 수 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누구나 아는 상식인데 각 정당은 그보다 훨씬 적게 썼다고 보고 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각 정당이 3백67억원에 근접하게 썼다고 보고했더라도 그 역시 믿기가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이처럼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제도가 버젓이 운영되고 그런 껍데기 제도에 맞춰 거짓말일 것이 분명한 보고를 각 정당이 하는 현실에 우리는 불쾌하고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 역시 각 정당이 대선때 얼마나 썼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고 그에 관한 아무런 증거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당시 보도된 단편적인 몇가지 비용만 갖고 추정하더라도 2백억원대는 손쉽게 훨씬 넘어선다. 가령 전국 2백37개 지구당에 한차례 1억원씩만 내려보냈더라도 2백37억원이다. 여기에 이미 알려진대로 수천 수만개의 시계·오리털파카·볼펜을 돌리고 관광·시찰 등을 시킨 것은 돈없이 한 일이겠으며,하루가 멀다하고 신문·TV에 광고를 낸 것도 공짜로 한 것인가. 문제의 현대중 하나에서만도 경찰수사가 밝혀내기로는 지금껏 1백33억원이 국민당에 넘어갔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구구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더라도 운동원의 일당이 고작 7천∼1만1천원으로 돼있는 선관위의 법정비용만큼도 안썼다는 정당들의 보고가 얼마나 허구인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요즘 인건비가 어떤데 그런 돈으로 선거운동을 시킬 수 있었겠는가.
하기야 정당들도 엄연히 법정한도가 있는 터에 그보다 더 썼다고 보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껍데기제도에 껍데기보고가 또 한번 되풀이된 것밖에 안된다. 선관위가 보고된 액수가 너무 적다고 하여 실사에 나선다지만 그 역시 아무런 실효도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제도를 고치는 수밖에 없다. 일찍이 선관위 실무자가 제시한 시안대로 선거비용의 지출뿐 아니라 수입까지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을 도입하고 선거비용지출창구를 은행계좌 등으로 한정한다든가 공인회계사의 검증을 반드시 거치게 하는 등의 개혁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선거때마다 이런 낯뜨거운 짓을 되풀이할게 아니라 정말 돈적게 드는 선거를 위한 제도개혁에 각 정당의 진지한 착안있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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