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이창호 9단 "왕위는 지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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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창호 9단이 '무관'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은 그의 신화적인 무적시대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놀라운 뉴스가 아닐 수 없다. 무적시대의 이창호는 너무 완벽했기에 실수를 하면 오히려 박수를 받았고 그때마다 동료 프로기사들은 이창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안도하곤 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이나 흘렀을까. KT배 왕위전 도전4국이 열린 2007년 6월 27일의 한국기원 분위기는 완연히 달랐다. 프로기사들은 이창호 9단이 왕위전에서 도전자 윤준상 6단에게 패배해 무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50% 이하는 아니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창호의 파워는 약화됐고 도전자들은 강해졌다. 특히 윤준상은 이미 이창호 9단을 3대 1로 꺾고 국수 자리를 탈취했고 왕위전에서도 2대 1로 리드하며 절정의 기세를 보여주고 있기에 그들의 냉정한 안목을 무정하다 말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은 이날 지난 세 판의 대국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보였고 결국 백을 들고 247수 만에 1집반 차로 이겨 2대 2 타이 스코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날 대국은 긴장과 떨림, 낙관과 비관을 오가며 아슬아슬하게 흘러가다가 형세판단과 끝내기에서 승부가 갈렸는데 최후에 이창호의 계산력이 한 발 앞섰던 것.

이창호 9단은 그의 무적 시절에 단판 승부는 가끔 놓쳤지만 '번기(番棋)에선 으레 이겼고 그래서 '번기의 제왕'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근래의 번기 승부는 예전의 어린애 손목 비틀기 식과는 크게 다르게 악전고투의 연속이고 이번 왕위전도 가까스로 2대 2를 만들었다.

최종전은 7월 18일 한국기원에서 열린다. 과연 이날의 승자는 누구일까. 이 9단은 이 판에서 승리하면 왕위 1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게 되고 패배하면 무관이 된다.

◆형이상학적인 초반전

우변을 크게 키운 뒤 백진 깊숙이 뛰어든 흑?가 윤준상 6단의 초반 승부수. 이때 28, 30으로 딴청을 부린 이창호 9단의 태도가 난해해 감히 측량할 수 없다. 뛰어든 적은 쳐다보지도 않고 멀리 허공으로 날개를 펴고 있는 이 수에 대해 프로들은 "상상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흑은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을까. 그는 31, 33으로 붙여 얼른 살자고 했는데 이 모양이 너무 무거워 오히려 백의 공격(38)을 불러들였다.

◆서로 낙관하는 중반전

백의 공격과 흑의 탈출이 길게 이어졌으나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쌍방이 모두 형세를 비관하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흑은 107에 이르러 드디어 백의 포위망을 확실히 벗어나게 됐는데 이 수 역시 낙관적인 무드를 띠고 있었고(강하게 둔다면 A) 그 바람에 108, 110을 당했다. 대마가 다시 엷어지며 우상귀에도 사는 맛이 남게 됐다. 국면은 극도로 미세한데 과연 누구의 형세판단이 옳으냐.

◆이창호, 1집반 승

완벽한 흑집 같았던 우변에 B의 끝내기가 남게 되었고 이게 종반의 변수로 작용하면서 백의 우세가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상 귀를 산 뒤 140에 손이 와서는 백의 우세가 좀 더 뚜렸해졌다. 윤준상 6단은 '흑불리'를 느끼고 있었으나 이창호 9단의 수순에 반발하지 못한 채 끌려다녔고 결국 1집반 차로 무릎을 꿇었다. 윤 6단이 굳어 있었던 반면 이창호의 끝내기는 빛을 발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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