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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심사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예년에 비해 올해 투고된 작품들의 경향은 대체로 이념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시의 대상과 소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해졌다는 것이 선 자들의 소감이다.
시의 수준이 고르고 평준화된 반면 평이성을 깨뜨리고 솟아오르는 시, 튀는 시가 적었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같은 생각은 우리 문화의 2000년대 주역이 될 신인들에게 거는 선 자들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70여명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 결선에 남은 작품은 고두현의『유배시첩』, 조연호의『그대여, 오늘은』, 우성용의『남산을 내려오며』, 이진엽의『북행 열차를 기다리며』, 권삼현의『사막』, 김해경의『혁명전야』등 여섯 편이다. 이 가운데 『혁명전야』는 같은 응모자의 시집 한 권 분량의 투고시 가운데에서 뽑은 작품으로 실험 시·해체시의 한 전형을 보여준 작품이다. 한 편을 놓고 볼 때는 유력했지만 여타 작품의 산만 성으로 탈락하였다.『사막』은 시의 화법이 특수하고 메시지의 전달도 무리 없지만 마지막 항의 처리가 힘을 잃었다.『북행열차를 기다리며』는 넓이를 생각하는 활달한 문맥과 신선 감이 돋보였지만 전형적 신춘시류의 틀과 아류를 벗어나지 못한 흠이 지적되었다.『남산을 내려오며』는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는 작자의 미세한 시각과 사고가 뛰어났지만 소품이다. 조연호의『그대여, 오늘』은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겨뤘던 작품이다.『그대여, 오늘은』은 화음의 진술이 독특하고 개성적이다. 그러나 굳이 산문시 형식을 고집해야 할 까닭이 있는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당선작으로 뽑힌 고두현의『유배시첩』은 격이 있고 전통적인 운율과 동양적 정조가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신인으로서의 새로움과 당돌함 대신 노련함과 달관된 화법이 있다.「잘 익은 시」로서의 깊은 맛이 있다. 유배된 인물 김만중의 감정에서 화자의 시법은 전통시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 보여준다. 그러나 선 자들은 기왕에 발표된「유배 시」류 들의 아류를 지적하고, 비판적 견해를 밝혔음을 첨언한다. <심사위원=김종해·정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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