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의 세계 준우승은 서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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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승부세계에서 1위의 차이는 마치 천당과 지옥을 방불케 한다.」
이번 대선에서 승자가 된 김영삼 후보와 패자가 된 김대중 후보에서도 결과는 너무 엄청나다. 따라서 92년 한해를 보내면서 스포츠계에서도 희비가 엇갈린 승자와 패자는 감회가 남다르다. 특히 간발의 차로 2위에 머무른 팀이나 선수는 더욱 회한이 많게 마련이다.
올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에 패해 2위를 차지한 빙그레도 졸지에 지옥으로 떨어진 대표적 케이스다.
빙그레는 8개 팀 가운데 페넌트 레이스에서는 1위에 올랐으나 정작 타이틀을 가리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놓치자 감독을 바꾸라는 팬들의 시달림 등 온갖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연봉협상에서도 2위의 악몽은 선수들의 발목을 꽁꽁 묶는 족쇄가 되고있고,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며 무적의 감독으로까지 칭송 받아온 김영덕 감독은 하루아침에 무능력한 감독으로 낙인찍혔다.
우승팀 롯데가 각종 환영행사에 초대되고 강병철 감독이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은 것과는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프로축구에서도 일화와 포철이 바늘 끝만 한 차로 영욕이 엇갈렸다.
우승팀 포철은 명예와 함께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특전을 얻게 됐으나 일화는 팬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사라지는 2위 후유증을 겪고 있다.
특히 일화는 우승 문턱까지 가다 불운으로 1위를 놓친 터여서 더욱 패배가 쓰라리기만 하다.
단체종목에서의 2위는 대부분 감독들이 그 공과를 떠맡게 마련이지만 개인종목에서는 선수자신이 패배의 고통을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올해 각 종목에서 2인자에 머무른 선수들도 이같은 쓰라림을 겪으면서 내년 시즌으로 설욕전을 넘길 수밖에 없게 됐다.
올해 바르셀로나 올림픽 배드민턴 여자단식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방수현(20·한체대)은 은메달 획득의 기쁨보다 수지 수산티(인도네시아)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아팠다고 한다. 그녀는 그동안 국제대회 때마다 수산티의 벽에 가로막혀 2인자에 머물러 왔는데 바르셀로나에서도 설욕에 실패, 참담한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그러나 방은 좌절을 딛고 맹훈련을 재개, 마침내 지난 11월 홍콩오픈 결승에서 수산티를 2-1로 꺾고 늪에서 벗어났다. 7연패 끝에 처음 맛본 승리였다.
탁구의 김택수(22·대우증권)도 올해 세계 최강인 스웨덴 선수들에게 연거푸 정상의 문턱에서 무너지는 좌절을 맛보았다.
김은 지난 4월 지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스웨덴의 페르손에게 3-0으로 패해 3위에 그쳤고, 이어 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역시 스웨덴의 얀오브 발드너에게 3-1로 발목이 잡혀 또다시 동메달에 머물렀다.
그러나 김은 지난 9월 IOC위원장 컵 국제대회에서는 발드너를 꺾고 우승을 차지, 스웨덴 징크스에서 벗어나는 청신호를 보이기도 했다.
방과 김은 비록 국제대회에서는 2인자였으나 국내에서는 1위를 고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골프의 박남신(33)은 최상호의 그늘에 가려 늘 2위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박은 올해 한국프로선수권대회 등 8개 대회에 출전했으나 팬텀 오픈에서만 가까스로 우승을 차지했을 뿐 최상호 벽에 막혀 세 차례의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한편 마라톤의 김완기(24·코오롱)도 올해 1인자가 된 황영조의 화려한 스타탄생을 지켜보며 홀로 외로움을 삼켜야했던 불운의 스타다.
김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35km까지 선두그룹을 이끌며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담당, 황의 우승에 헌신적 기여를 했으나 정작 본인은 28위로 처져 참담하기만 했다.
이후 김은 와신상담 끝에 훈련을 재개, 지난 11월 1일 뉴욕마라톤에서 3위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밖에도 각 종목에서 정상정복에 실패, 내년을 기약하는 선수들은 부지기수다. 내년을 기약하며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소리 없는 갈채를 보내야 할 때다. <권오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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