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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7가] 5선발 백차승과 김병현의 비애

중앙일보

입력

하루 던지면 4일 쉬고 닷새째 등판하는 것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현대 야구에서 제5선발 투수는 '메뚜기'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지 못합니다. 한국이나 메이저리그나 마찬가지입니다. 중간에 이동일(휴식일)이라도 하루 끼어 있으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1~4선발 투수들에게 등판 순서를 양보해야 합니다. 시즌이 흘러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팀이 이기려면 더 나은 투수를 한번이라도 더 기용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5선발 투수는 자신의 전공 강의를 배정받지 못한 '시간 강사'입니다. 감독이 롱 릴리프로 던지라고 하면 보따리를 싸 불펜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5선발 투수는 '땜질 투수'이기도 합니다. 이동일이 없는 장기 연전 때 에이스에게 4일의 휴식을 주기 위해 그 하루를 메워 주는 것은 기본이고 부상을 당하거나 부진에 빠진 투수가 생겼을 땐 '대타' 노릇도 해야 합니다.

땜질 투수들은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오는 게 보통입니다. 기존 롱 릴리프 중에서 수혈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불펜의 또 다른 손실을 불러 대부분의 팀들이 마이너리그의 선발 요원들을 불러 올립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5선발은 팀의 미래를 이끌고 갈 유망주들이 자라나는 '사관학교'이기도 합니다. 현재 메이저리그의 선발 투수들은 대부분 이 과정을 거쳐서 '붙박이' 선발을 꿰찼습니다.

팀한테는 이보다 더 경제적으로 선발 투수를 키워 내는 길은 없습니다. 빅리그 최저 연봉(올해는 38만 달러) 그것도 다 주는 게 아니라 머무른 일수만큼만 주고 보물을 캐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이나 일본의 1~2선발 투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오면 5선발은 너끈히 맡을 수 있는데도 쉽게 못 오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원하는 것은 비싼 돈을 주더라도 성적을 낼 수 있는 '용병(傭兵)'이지 키워야 할 '유망주'가 아닌 탓입니다. 한국이나 일본 선수들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국보다 훨씬 적은 최저 연봉으로 풀칠하면서 전임 교수도 아닌 시간 강사 노릇을 할 선수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최근 플로리다 김병현과 시애틀 백차승이 자신들의 선발 등판 순서를 건너 뛰었습니다.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밀려난 것이었습니다. 바로 선발 로테이션의 말석 5선발 투수인 탓입니다.

에이스 펠릭스 에르난데스의 부상 공백을 메우며 전형적인 '땜질' 5선발이었던 백차승은 '보따리 장수'의 비애를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감독 조차도 얼마 전에야 알았을 정도로 '어깨 근염'이란 부상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아픈데도 참고 던졌을 개연성이 큽니다. 과거 보스턴 레드삭스의 조진호가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와 5선발로 뛰며 신세한탄처럼 내뱉었던 말이 떠오릅니다. "우리 같은 선수는 아프다고 말도 못꺼내요. 바로 내려 보내거든요."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올 선수들은 항상 차고 넘칩니다.

김병현은 또 다른 점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백차승보다 연봉이 7배 가까이 많은 250만 달러의 그를 바라보는 플로리다의 시각은 어떤 것인가요. 시간 강사도 보따리 장수도 사관생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확실하게 기존 선수의 땜질 이상을 해주기를 바라는 용병입니다. 몸값을 못한다면 이미 용병으로서 자격 상실입니다. 그의 앞날이 더욱 가파를 수밖에 없습니다.

구자겸 USA중앙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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