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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수재 '용' 만들려면 평준화·3불정책부터 깨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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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뉴스분석 "개천에 있는 사람은 항상 골목대장만 할 게 아니다. 개천에서 때때로 용도 나오고 잉어도 나올 수 있도록 코스를 만들도록 하겠다."(노무현 대통령)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로를 복구하기 위한 것이다."(김신일 교육부총리)

노 대통령과 김 부총리는 26일 대학총장들과의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소득층 자녀의 정원 외 입학을 허용하는 기회균등할당제의 논리적 근거다. 노 대통령은 "저소득층에 입학 기회를 주는 것은 더불어 살고 함께 가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가치"라고 설명했다.

기회균등할당제는 노 대통령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했다. 노 대통령은 집권 이후 여러 차례 "가난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악순환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부에는 교육 양극화 해소 대책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교육부는 노무현 정부 들어 저소득층 방과후 학교 확대, 달동네와 농어촌 낙후 지역을 교육복지 투자우선 지역으로 선정해 매년 5000억원 이상을 투입해 왔다. 특히 지난해에는 전문계(옛 실업계) 고교의 대입 정원 외 특별전형을 3%에서 5%로 확대했다.

그러나 소득계층 간 사교육비 양극화는 심화되고 명문대 진학 격차도 계속 커져만 갔다. 고심하던 교육부는 형편이 어렵고 성적이 떨어지는 소외 계층에 대학 입학 기회를 주는 방안을 내놨다. 흑인이나 소수 인종, 저소득층에 교육의 균등 기회를 주는 미국의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 제도를 본딴 인상이다.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은 이 제도의 대표적 수혜자다. 자메이카 이민자 가정 출신의 흑인이지만 이 제도 덕분에 뉴욕시립대에 들어갔고,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

기회균등할당제가 가난한 수재를 용으로 만들지는 불투명하다. 인하대 박제남 입학처장은 "가난한 수재가 인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평준화와 3불(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정책을 깨고 실력대로 시험을 봐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행 방안도 따져봐야 한다. 우선 저소득층 선발 여부는 전적으로 대학 자율이다. 올해도 대학들은 농어촌 학생, 재외 국민, 실업고생, 장애인 등을 정원 외 특별전형으로 최대 11%(법정 모집 비율)까지 뽑을 수 있다. 그러나 대학들은 이 제도를 잘 활용하지 않는다. 실력이 부족한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2007학년도의 경우 최대 9%까지 뽑을 수 있었으나 3.9%만 선발했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아예 11% 전체를 저소득층 학생만으로 채울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대학들은 고개를 흔든다. 저소득층 입학 우대정책을 시행하면 서울 명문대에 지원이 몰려 지방대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토론회에 참석했던 영산대 부구욱 총장은 "고졸자의 대학진학률이 82%를 넘는 상황에서 기회균등할당제를 도입할 경우 문제가 많다"며 신중하게 검토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학력을 통한 신분상승을 도우려면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게 더 중요한데 일시적인 혜택만 주려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외대 김춘식 교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한 저소득층 학생에게 정부가 장학금을 지급해 학업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양영유 기자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여성.흑인.히스패닉과 같은 미국 내 사회적 소수자에게 대학 입학, 취업, 진급, 연방정부 사업 참여에 일정한 쿼터를 인정해 주는 정책. 인권운동이 활발하던 1960년대 린든 존슨 대통령 때 도입됐다. 일부 백인 보수파가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하는 역차별이라며 수차례 위헌소송을 냈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은 1978년에 이어 2003년에도 대학의 인종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합헌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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