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함부로 가위질 말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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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27면

“냉면 드시러 가죠.”
“냉면은 겨울에 먹는 거지.”
“동짓달 시식이라고 해도 여름에 가장 많이 먹잖아요. 그런데 어디로 가죠?”
냉면에 대해서는 저마다 할 말이 많다. 그래서 어느 냉면집으로 갈지를 정하는 게 쉽지 않다. 마침내 서울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는 평양냉면집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제육에 소주 한잔을 하면서 냉면의 유래부터 이야기를 꺼낸다.
“1849년에 『동국세시기』에서 냉면을 처음 언급하니 그 이전부터 먹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지금이야 국수 하면 밀가루를 떠올리지만 예전에는 메밀이 국수의 주재료로 쓰였죠. 조선시대에도 왕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국수는 메밀국수였잖아요. 밀가루는 중국의 화북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진말(眞末)이라고 부르고 성례(成禮) 때가 아니면 먹지 못할 만큼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요즈음 결혼식 피로연에서 국수를 내는 것도 그런 이유죠.”
“그러니까 우리가 냉면을 먹기 시작한 시기는 더 오래전이라는 말인가?”
“냉면이라는 말이 없어서 그렇지, 아마도 더 오래전부터라는 생각이 들어요. 메밀 반죽을 국수틀에 넣어 꾹 눌러 국숫발을 만드는 압착면(壓搾麵) 방식이 17세기에도 있었으니까요.”
“메밀은 점성이 약하기 때문에 끓는 물 속에 바로 국숫발을 밀어넣었는데 강한 점성의 국수를 얻기 위한 방식이지. 그래도 메밀만으로는 뚝뚝 끊어지니까 점성이 강한 녹말을 섞어 쓰는데, 섞는 비율에 따라 국숫발의 느낌이 다르지.”
“섞는 비율이 문제죠. 녹말을 잔뜩 집어넣으면 고래 심줄처럼 질겨지는데 그걸 진짜 냉면인 줄 아는 사람이 많지요. 게다가 국수 색깔이 진해야 메밀이 넉넉히 들어갔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메밀의 도정 정도에 따라 다르죠. 메밀국수는 겉메밀을 섞어서 만들기 때문에 색깔이 진하지만, 일반적으로 속메밀만 쓰는 냉면의 국수는 색이 연하죠.”
“구한말에 『조선만화』라는 기행문을 낸 일본인이 국숫집에 대해 ‘(조선) 국수는 눈과 같이 하얗고 일본의 소면보다 희다’라고 쓰고 있지.”
사실 반죽법, 숙성방법, 면의 굵기에 따라 국숫발이 다 달라지니 배합 비율이 국수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잘못된 습속은 국숫발이 지나치게 질기면 가위로 국수를 싹둑싹둑 자르는 법이다.
“냉면집 가위를 보면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어. 서울의 어느 유명한 냉면집에서 서릿발이 머리에 내린 어르신 한 분이 냉면을 시키셨지. 냉면을 들고 온 아주머니가 묻지도 않고 가위를 들이대자, 어르신께서 가위 든 손을 밀치면서 ‘나라가 잘린 것도 서러운데, 냉면까지 잘라?’라고 호통을 쳤다지. 그러자 아주머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가위로 자른 냉면을 먹던 손님들이 모두 죄인이나 된 듯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냉면을 먹었다는 거야.”
서울의 유명한 냉면집들 상당수는 동대문운동장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바로 이곳이 실향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시장에서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냉면 한 그릇에서 고향을 만날 수 있었다. 투명하면서도 시원한 육수가 목구멍을 타고 찌르르 하루의 피로를 가르며 내려간다.

김태경·정한진의 음식수다 -냉면 이야기,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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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것 먹기를 낙으로 삼는 대학 미학과 선후배 김태경(이론과실천 대표)ㆍ정한진(요리사)씨가 미학(美學) 대신 미식(美食)을 탐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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