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3허 등장 신군부 정권-주춧돌 놓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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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80년 봄을 거치면서 알만한 이들 사이에서 「3허」라는 칭호가 조심스럽게 떠돌기 시작했다.「3허」의 존재는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날개 삼아 급속히 항간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허화평(55·현 민자당의원), 허삼수(56· 현 민자당의원), 허문도(52·전 통일원장관)씨가 그들이었다. 이중 허화평·허삼수씨는 육사17기 동기생에다 같은 「하나회」멤버였고 허삼수· 허문도씨는 부산고(10회)동기동창 관계. 5공 정권의 출범과정과 이른바 「개혁작업」에서 엄청난 역할을 했던 이들은 올해 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각자의 고향에서 출마했다. 허화평(포정)· 허삼수(부산동구)씨는 당선되었고 허문도씨(충무-통영-고성)는 원내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들은 「3허」라는 자신들의 별칭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철저히 저널리스틱한 표현일 뿐』 (허화평),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말』 (허삼수)이라며 「3허」라는 묶음표를 부인하고 있다.

<전씨 다음갈 권세>
실제로 이 세명 중 허문도씨는 역할이나 활동시기로 보아 따로 분류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유력하다. 앞의 두 허씨는 군 출신으로서 「목숨걸고」정권을 잡은 대열에 드는 반면 허문도씨는 신 군부 측 입장에서는 「무임승차」를 한 민간출신인데다 5공 후반기(84∼86%년 정무1수석, 86∼88년 통일원장관)를 전성기 (?)로 보아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허화평· 허삼수씨는 79년 12·12사태부터 5공 초반에 걸쳐 전두환씨 다음갈 정도로 막강한 위치였으며, 82년 말 청와대 수석비서관직을 함께 물러남으로써 하루아침에 권력을 잃은 경우에 해당한다.. 한 신 군부 측 인사는 『굳이 묶자면 허화평· 허삼수에 이학봉씨(전 민정수석)를 포함해야 「신 군부의 대령급 실세」로 자타가 인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허문도씨는 5공 초반 언론통폐합계획을 세우고 이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적극적으로 권유· 관철시킨 점에서 역시 국정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이『나는 40대에 이 나라를 동으로 가자, 서로 가자 해 본 사람 (14대 총선 유세발언)』 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3허」가 막강했기에 이들의 출신학교인 육사나 부산고 또한 막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육사는 애초부터 5공 인맥의 본류였으니 당연하다 치고, 지방명문 부산고는 5공 정권의 성립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정치인을 배출하게된다.. 이 과정에서 허삼수· 허문도씨와 김진영(현 육군참모총장)·윤석순(전 의원)씨 등 부산고 10회 출신들의 역할이 특히 두드러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세 허씨 중 정권장악에 직접 공을 세운 허화평· 허삼수씨는 처음부터 자신들의「개혁작업」을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허문도씨는 달랐다. 스스로 자청해 적극적으로 신 군부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허문도씨의 5공 합류를 도운P씨 (현 의원)의 회고.
『80년 2월초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주일 한국대사관의 공보관으로 있던 허씨가 귀국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어요. 해외공보관 회의 차 서울에 왔다고 해요. 나는 허씨와 그전부터 안면이 있었습니다. 그가 숙소로 쓰고 있던 플라자호텔에 가서 만났지요.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 나는 박정희 대통령시절부터 전두환 장군을 비롯한 정규육사 출신들과는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알겠다고 응낙하고는 보안사령관실에 면담신청을 해 다음날 오후4시로 약속을 받아냈어요. 허씨를 전 장군에게 소개해 주고 나는 먼저 나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전 장군이 허씨의 열변에 큰 관심을 보이더라는 겁니다. 30분으로 예정됐던 면담시간이 1시간30분으로 늘어나고, 다음날에 또 한차례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언론통폐합 관철>
허씨는 『지금 3김씨나 최규하 대통령의 지도력으로는 나라의 장래가 불안하다. 힘을 바탕으로 한 새 질서가 창출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자칫하면 브라질이나 그리스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요지로 군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두달 뒤인 80년4월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됐다. 일개 해외공보관에서 순식간에 권부의 핵심권으로 진입한데는 신문기자출신으로 동경대 박사과정에서 메이지유신을 공부한 점, 매우 강경한 우파논리 등이 신 군부 주역들의 성향에 꼭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P씨는 『얼마 후 보안사에 들렀더니 허삼수 인사처장과 허문도씨가 서로 말을 놓고 있어 놀랐다. 구들이 고교동기동창 관계였고, 그때가 졸업 후 처음 다시 만난 사이였다고 하더라』고 회고했다.
허씨는 전두환 장군의 이미지 메이킹 작업을 하는 일방 언론통폐합을 위해 신군부 인사들을 부지런히 설득했다. 그가 국보위시절 입안한 통폐합방안을 전두환씨 측에 의해 두 차례나 기각 당하면서도 결국 관철시켜 사상 유례없는 「언론대학살」이 빚어지게 한 사실은 88년의 5공 청문회 과정에서 이미 밝혀진 바 있다.
허씨는 또 서울 중심가의 한 빌딩(동방빌딩602호)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비밀작업을 벌여 훗날 『그곳에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판결문이 작성됐다』『언론통폐합 작업을 지휘했다』는 등 구구한 억측을 낳게 했다.
이에 대해 당시 허씨의 사무실에서 일했던 대학교수 K씨는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증언에 응했다.
『허문도씨는 나를 비롯한 교수 여러명을 접촉해 5공화국의 통치이념을 가다듬는 작업을 의뢰했어요. 80년9월 전두환 장군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후의 일이었습니다. 허씨가 우리에게「나는 남산에 일이 많아 바쁘고, 당신들이 시내에 나오면 작업할 장소도 마땅치 않고 하니 사무실과 여직원을 하나 붙여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사무실이 생긴 겁니다. 그곳이 언론통폐합의 산실이었느니 하는 말들이 많은데,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전두환씨의 전기를 내는 일을 거기서 했어요. 천금성씨의 집필작업과는 별도로 전 대통령의 정치이념을 담은 저서를 따로 내기로 돼 있었거든요. 「창조적 민족주의」 및 「자주민족국가의 건설」을 기본이념으로 해 전기를 완성했는데, 결국 출판되지는 못했습니다. 핵심세력 안에서 「정권 출범기에 대통령의 저서를 내는 것은 후진국에서나 하는 짓」이라며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무실은 곧 정리됐고 책도 그냥 사장됐습니다」

<"우유부단한 처신">
『3김과 최 대통령의 지도력을 믿을 수 없다』는 허문도씨의 주장은 다른 두 허씨의 입장에서도 귀에 쏙 드는 내용이었다. 이 「양허」씨는 신군부 내에서 그야말로 핵심 중의 핵심으로 허문도씨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의 관점에서 「서울의 봄」당시 최 대통령의 신중한 처신은 단지 우유부단함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런 관점을 부추긴 몇몇 사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 예가 80년1월12일의 환율 인상 때였다. 그 전해인 79년12월24일 환율 인상안을 들고 최 대통령의 결재를 받으러 갔던 김원기 당시 재무부장관(68·현 국민대이사장)은 즉시 재가하지 않은채 『서류를 두고 가라』고 대통령이 말하는 바람에 크게 당황했다고 회고했다. 환율인상은 고도의 보안과 결단을 요하는 일이었다. 당초 환율인상 예정일은 이틀 뒤인 26일이었다. 더 큰 일은 최 대통령이 재무장관의 인상안에 대해 이곳 곳에「의견」을 물은 일이었다. 당연히 비밀이 새나갔고, 결국 환투기로 이익을 본 기업과 개인이 많았다. 김원기씨는 『그 분이 워낙 신중한 성격이라 인상안에 대해 여론이나 권위자의 의견을 들어보려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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