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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북한 비핵화 의지 확신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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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의 22시간 방북을 계기로 북핵 협상이 입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서울과 평양, 워싱턴.베이징.도쿄.모스크바를 넘나들며 다양한 대화 채널이 열리고 숨가쁜 협상 메시지가 오가고 있다. 힐 차관보는 이번 방북을 통해 북측의 핵시설 폐쇄.봉인, 불능화에 뒤이은 북.미 관계정상화의 일정까지 폭넓게 논의했다. 그는 22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확신을 완전하게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모든 핵 프로그램의 신고와 고농축 우라늄(HEU) 실체 인정과 폐기 등 비핵화 과정에서 도사리고 있을 장애물에 대해 북.미가 포괄적인 해법에 대해 교감을 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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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외교가에선 북핵 해결의 비관론이 약해진 대신 예상 밖의 급진전이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 섞인 관측이 나온다. 한.미가 목표로 하는 연내 불능화에 북측이 동의했다면 향후 북핵 시나리오는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북한이 6자회담 수석대표 회담을 7월 초에 열기로 하는 방안에 긍정적 의사를 표한 것도 2.13 합의 이행에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메시지다. 한.미는 북한이 영변 원자로를 폐쇄해야 차기 6자회담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려면 북한이 조만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초청하고, 원자로 폐쇄.동결에 속도를 내야 한다.

북측은 힐 차관보의 방북을 통해 미 정부의 북핵 해결 의지를 확인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힐 차관보의 방북 시기.형식이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철회됐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국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를 처리하면서 대북 강경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뉴욕 연방준비은행까지 동원했다. 힐 차관보는 북한의 비핵화 진전 속도에 따라 6.25 종전 선언→평화협정 체결→북.미 국교 정상화로 이어가는 수순을 밟을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이날 "힐 차관보의 방북 승인 과정에서 대북 강경파로 알려진 딕 체니 부통령이 반대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고 이날 보도했다. 북한도 북.미 수교에 대해 조바심을 드러냈다.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이날 "조선과 국교 수립을 원한다면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부시 정권은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미 양자 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북.일 수교 교섭도 가속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을 통해 3개월가량 표류했던 2.13 합의 체제가 신속하게 복원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핵 시설 폐쇄 이후 이르면 7월 말께 6자 외교장관 회담이 열리면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논의는 더욱 무성해질 전망이다.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의 미국 방문,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의 중국.러시아 방문도 그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중국 양제츠(楊潔) 외교부장의 방북 일정 역시 마찬가지다.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그동안 "북핵 문제의 해결 속도가 빨라지면 모두들 여름휴가를 반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왔다. 올 연말까지 한반도를 무대로 한 대규모 외교전을 예고하는 말이다.

정용환 기자

◆핵 불능화(disablement)=원자로.핵 재처리시설 등 핵 시설에서 핵심 부품을 제거해 핵 관련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핵 폐기 과정의 하나다. 자동차의 경우 핵심 부품들을 빼내 폐차 처분하는 것과 유사하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이를 '황소를 거세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고농축 우라늄(HEU)=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우라늄(U- 235)의 비율을 30% 이상으로 높인 것이다. 자연 상태의 천연우라늄은 U-235 0.3%와 U-238 99.7%로 구성돼 있다. 핵폭발을 일으키려면 핵U-235 비율이 90% 이상 돼야 한다. 순도 30%를 넘는 고농축 우라늄은 원자로에서 사용할 수 없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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