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주영씨의 다음 수순(송진혁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정치가는 뒤로 무슨 짓을 하든 겉으로는 애국애족이니,공동선이니 하는 도덕성의 포장이 매우 중요하다. 단,뒤로 하는 부도덕한 짓이 결코 들키지 않아야 한다. 만일 들키는 날이면 그는 하루아침에 표와 인기가 내려가고 세력을 잃거나 심하면 매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가는 좀 다른 것 같다. 기업가는 사업을 하면서 굳이 애국애족이니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법에 걸리지만 않고 최대로 벌기만 하면 성공이다.
○기업가·정치인은 차이
이처럼 도덕이란 직업에 따라,사람에 따라,또 사회에 따라 다 다르다. 그리고 도덕이란 외면적 강제력을 갖는 법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에 있는 것,내면적인 것이다. 도덕을 어겼다고 징역가는 것도 아니요,불이익이라면 비난·인기하락 같은 추상적인 것이다.
이번에 대선정국을 뒤흔든 「현대사건」은 불가피하게 정주영씨의 도덕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는 진작 현대에서 손을 뗐다고 공언했고 남의 돈,부정한 돈은 한푼도 쓰지 않는다고 호언했다. 심지어 국민당은 국민의 혈세를 어찌 정치자금으로 쓸까 보냐고 국고지원금을 장학금으로 내놓는다고까지 했다. 이처럼 그는 「깨끗한 정치」와 「정치개혁」을 내세워왔다.
그러나 현대사건은 그의 공언과 호언을 졸지에 뒤집어 버리고 말았다. 현대사건은 그가 현대에서 손을 떼지도 않았고 남의 돈 신세를 안지고 있는 것도 아님을 여실히 보여줬으며 심지어 범죄세계에서나 나오는줄 알았던 돈세탁이란 말까지 등장시켰다.
하기야 현대사건이 대선에 미칠 영향은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정 후보에게 큰 타격이 될수도 있고 반대로 동정표를 몰아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사건 자체의 진상도 아직 다 밝혀지지도 않았고 정씨 특유의 억척스런 투혼과 불굴의 의지로 이 사건을 극복해 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이 시련을 이겨내든,못 이겨내든 그런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밝혀진 그의 허언이 제기하는 도덕성의 문제는 이미 국민 머리속에 각인돼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성문제 어찌될지
더욱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그가 현대사건이 터진 후에도 사건의 내용을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하면서 관권탄압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대계열사들이 조직·자금·인력을 동원해 불법적인 선거운동을 했는가,안했는가의 문제다. 했다면 수사는 당연하고 탄압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강압적 수사로 한 것처럼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탄압임이 분명하다. 또 현대중공업의 비자금 조성문제도 국민당에 그 돈이 갔느냐,안갔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국민당도,현대도 아직 그 대목에 대해선 말이 없다. 왜 말이 없는가. 『민자당은 봐주고 우리만 왜 몰아붙이느냐』는 국민당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국민당이 문제삼는 민자당의 시계배포와 현대사건은 상쇄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일부에선 현대는 정주영씨가 이룬 것인데 자기회사 돈 끌어쓰는게 뭐가 나쁘냐고 한다는 말도 들리지만 그것은 말이 안된다. 9조원의 빚을 주고 있는 채권자와 주주들이 있는데 어떻게 현대그룹이 정씨 사물일 수 있는가.
어찌보면 정주영씨는 「코리언 드림」(Korean Dream)의 한 상징적 인물이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막노동에서부터 온갖 궂은 일을 하다가 몸을 일으켜 당대에 한국 제1의 대재벌을 이룩했으니 그는 젊은세대에 꿈을 심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징이라 할만하다.
그의 성공을 본받아 많은 젊은이들이 나도 열심히 일하고 창의력을 발휘하면 대재벌도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해주는 산 증거다. 기업성공에 못지않게 정치가로서의 그의 변신도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정계에 입문하자마자 일약 원내 제3당의 당수가 되고,불과 몇개월 사이에 30여년의 정치경력을 가진 두 김씨와 어깨를 겨루는 대선후보가 되었다. 선거운동에 있어서도 그는 거칠면서도 묘하게 급소를 찌르는 특유한 언변과 국민정서를 때리는 특이한 공약 등으로 줄곧 바람을 일으켜왔다.
이런 그의 성공으로 가득찬 생애 자체가 젊은이를 자극하고 근면과 창의를 북돋움으로써 나라발전에 기여하는 커다란 도덕성의 원천이 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 현대사건으로 그의 도덕성에 의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질때 과연 그를 본받자는 젊은이의 열정이 그대로 유지되겠는가.
○수습방법에 관심 집중
도덕성이란 원래 달걀처럼 어느 한쪽이라도 깨지면 복원이 안된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 다음에 참말을 해도 믿지 않게 된다. 한번 돈을 떼먹고 나면 원래 신용있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그의 신용은 이미 안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성은 달걀과는 다른 것이 반성·사과·재정진 등의 노력이 있으면 복원·고양 될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사건을 맞아 정주영씨가 도덕성의 복원 없이 깨진 달걀처럼 나가서는 아무리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지만 대선에도 영향을 안받을 수 없을 것이다. 과연 어떤 수순·어떤 의식을 정 후보가 마련할는지 궁금하다.<수석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