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거글글글] 벼랑에서 맛본 딸 없는 설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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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무더운 여름날이지만 햇살이 스러지는 해거름, 인수봉엔 바람이 제법 세다. 바람결에 몰려온 어스름이 한 겹, 두 겹 봉우리를 덮고 능선을 지운다. 더위를 피해 느지막이 나선 터라 등반은 그늘 속에서 자못 여유로웠다. 그러나 깜깜해지기 전에 벼랑을 내려서야 하산길이 안전할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다. 한데 친구가 등반하다 말고 배낭을 벗는 게 아닌가. 배낭 뒷주머니를 뒤지더니 전화기를 꺼낸다.

"왜 그래?"

"@#$%▶&*()_+!~"

휴대전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바람에 뒤엉켜 옆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다. 다만 백운대 위에서 반짝이는 초저녁 별처럼 초롱초롱한 목소리로 보아 친구의 초등생 딸아이다.

"알았어, 빨리 갈게."

종일 더위에 시달린 여름 저녁, 아빠가 외식이라도 시켜 주면 좋으련만 어두워지도록 오지 않으니 뿔이 날 만도 하지.

"응, 고마워."

이건 또 무슨 얘기? 의아한 눈빛으로 친구를 돌아보니 그는 전화기 폴더를 탁 닫으며 씩, 웃는다.

"아, 딸 녀석이 언제 오냐고 묻잖아. 지금 집에서 고기를 먹고 있다고…."

"그런데?"

"아빠 것은 어디 있느냐고 딸 녀석이 엄마에게 물어봤다네."

"오, 역시 딸이네."

아들은 열 명이 있어도 이 어둠 속의 바위처럼 묵묵히 자기들 배속 채우기에 바쁠 텐데.

"그런데 엄마가 그러더래. 아빠 거는 무슨 아빠 거! 없어!"

"하하하! 그럴 만도 하지?"

"그래서 딸이 아빠 빨리 오라는 거야. 아빠 거, 자기가 남겨 놓겠다고."

"쩝…"

"빨리 내려가자."

춥다. 벼랑에 몰아치는 바람을 너무 쐬었는지 속이 떨린다.

*이 글은 조인스 블로거인 중앙일보 배두일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blog.joins.com/excelsio)에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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