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전두환 사령관 "「단임」어기면 나를 쏘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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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에게는 두가지 원칙이 있어. 첫째, 내 밑에는 중간보스를 인정하지 않을 거야. 둘째, 일은 소관업무 담당자한테 철저히 맡기고 그만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겠어. 자기 업무에 게으름 피우거나 공연히 남의 업무영역을 기웃거리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어.』
전두환 대통령시절 청와대비서관을 지낸 이들은 전대통령이 이 같은 요지의 말로 자신의 「권력운용의 대원칙」을 피력했다고 증언했다. 이런 발언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내 적자로서 그가 보고 들었던 권력 암투의 폐해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해석됐다. 최근 발간된 김성익 전 청와대비서관의 저서 『전두환 육성증언』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보안사에 가서 권력주변을 보니 박대통령 주변이 형편없었어. 김재규·차지철·정당관계 암투가 있어. 박대통령이 상당히 위험할 것 같았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했어. 망하려니 그런가 봐.』
이 때문인지 5공화국 시절의 비서실장들은 대통령 재임기간을 고려하더라도 모두 단명이었다. 박대통령 시절의 이후락씨가 5년10개월, 김정렴씨가 9년2개월간 재임한데 비해 전두환 대통령(11, 12대 포함 7년6개월 재임)때는 모두 7명의 비서실장이 줄줄이 청와대를 거쳐갔다. 김경원(1년4개월)·이범석(5개월)·함병춘(1년4개월)·강경식(1년3개월)·이규호(9개월) ·박영수(1년9개월)·김윤환(7개월)씨 등이 그들이다.
비서실장 휘하의 수석비서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무1수석비서관만 하더라도 우병규·허화평·정순덕·허문도·김윤환·이진우씨 등 6명이 거쳐갔으며, 이중재임2년을 넘긴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확실히 전두환 전대통령은 박대통령의 「측근정치」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듯하다. 허화평·허삼수씨 등 신군부의 대령급「킹 메이커」들이 날로 위세를 떨치자 그는 82년말 이들을 잘라버렸다. 중간보스를 허용치 않는다는 자신의 방침을 적용한 것이다. 양허씨가 수석비서관 자리를 물러나자 당시 권부 주변의 인사들은 『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당하는 것을 보니 우리는 정말 파리목숨이구나』라고 입을 모으며 바짝 숨을 죽였다고 한다.

<단칼에 양허씨 거세>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측근들의 발호를 막으면서 80년대의 과도기를 강력한 친정 체제로 끌고 가는데는 성공했지만 친인척 관리에 실패해 결정적인 오점을 남겼다. 이 점에 대해 5공의 한 전직 관료는 색다른 해석을 했다. 『전씨는 군인출신 아닙니까. 군 출신들은 자기 가족에 대해 일반인과는 다른 관념을 갖고 있어요. 처자식을 끔찍이 아끼고 잘해 줍니다. 군인인 자기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졸지에 과부가 되고 고아가 될지 모를 식구들에게 평소 잘해주는 겁니다. 나는 전씨가 친인척에게 약했던데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사고방식도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공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변명의 여지도 없지만 그런 인간적인 약점이 숨어있었다는 얘기지요.』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또 한가지 아킬레스건이 있다. 인권탄압과 함께 집권과정에서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다. 훗날 그의 통치기간이 다각도로 냉정치 평가될 때, 이 점 또한 큰 장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경제방면에서의 실적과 더불어 한국에서 처음으로 「청와대를 제발로 걸어 나간」대통령이라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전씨에 대한 후세의 평가에서 반드시 짚어져야 할 대목이다. 5공의 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이런 증언을 했다.
『전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우여곡절 끝에 임기를 7년 단임제로 개헌하기로 방향이 잡혔어요. 그때 한 후배장성(신 군부핵심)이 전사령관을 찾아가 「7년은 너무 긴 것 아닙니까」라고 조심스럽게 간언했습니다. 그러자 전사령관은 단호하게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내가 7년을 하고 또 7년 더 할까봐 그러는 거지! 내가 또 해먹으려 하거든 네가 나를 쏘아 버리면 될거 아냐! 사나이답지 못하게 왜들 그래」라고 말입니다.』

<처음엔 jp가 대안>
도대체 전두환장군은 언제부터 집권할 야망을 품게 됐을까. 또5공화국 헌법의「7년 단임」이라는 대통령 임기는 어떻게 결정된 것일까.
증언들을 종합하면 79년 12·12사태를 치른 후에도 5공신군부는 자신들이 차기 정권을 잡겠다는 내부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또 12·12사태 이전에는 김종필씨를「대세」의 인물로 꼽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전-김 사람을 다 잘 아는 인물로 10·26후 양인간의 메시지 전달역할을 했던 P씨(현 의원)의 말. 『10·26후 79년 11월초까지만 해도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면 「대안은 JP뿐」이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나보고도 JP를 좀 도우라는 말을 했지요. 한번은 전사령관으로부터 이런 일을 JP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한 적도 있습니다. 「네가지 사항을 JP에게 전해 달라. 첫째, 5·16혁명주체만 너무 끼고 돌지 말아달라. 둘째, 8기생(김종필씨의 육사동기)만 편애하지 말아 달라. 셋째, 비서실(김종필 공화당총재비서실)의 잡음을 좀 정리해달라. 넷째, JP가 일본 통인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앞으로는 미국과도 친하게 지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하튼 이즈음까지는 JP가 대안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1980년 1월17일 저녁,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서울시내 모처에서 언론사 중견간부 몇 명을 만나 식사겸 술을 마셨다. 그로서는 언론인과 처음 갖는 사적인 만남이었다. 이 자리에서 전사령관은 『JP는 안되겠어』라는 말을 서슴없이 털어놓아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한달여 사이의 중대한 변화였다.

<장기집권 방지 초점>
80년「서울의 봄」이 공간에서 신군부가 장막 속에서 어떤 계획을 꾸몄든간에 공식적으로 전두환 장군이 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분수령은 중앙정보부장직 겸임(80년4월14일)이었다. 그 후에는 물론 5·17이라는 「굳힘수」가 있었다. 5월17일 자정을 기해 발령된 비상계엄확대조치는 신군부집권의 신호탄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5·17조치에 즈음한 성명을 통해 『그동안 누차 천명한바 있는 정치발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으며, 이를 계속해서 착실히 추진해 나가겠다』고 다짐했으나 그의 말은 이미 권위와 설득력을 잃고 있었다. 「봄」은 여름으로 가지 못하고 겨울로 U턴하고 있었다.
10·26이후 만발했던 개헌논의들도 일시에 얼어붙었다. 80년 초반당시 각 정당과 서울변호사협회, 일부 헌법학자들이 저마다 내놓은 개헌시안들은 대체로 대통령직선제·국회의원의 소선거구제·대통령의 4년 임기제(1차 연임허용)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원집정제와 6년 단임 대통령제가 최규하 정부측에 의해 조심스럽게 검토되고 있었다. 이 모두가 5월에 이르러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폐지되어야한다는 대전제 아래에서 어떤 권력구조든 장기집권을 방지하고 국민기본권을 산장해야 한다는 개헌방향은 국민적인 합의사항이었다. 신군부는 이중 「장기집권에의 혐오감」에 주목하고 자신들이 택할 새 헌법안중 「대통령의 단임」부분에는 일찍 합의에 이른 흔적이 많다.
5·17로 중단됐던 개헌작업은 80년 6월2일 정부의 「개헌요강 작성소위원회(위원장 전봉덕)」가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본격화됐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집권자가 사실상 예정된 상태에서의 개헌작업이었다.<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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