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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앙우체국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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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 중앙우체국이라면 명실공히 우리나라 우체국의 시조이자 대명사로 통한다.
전국의 우체국수는 11월말 현재 총3천3백82개소(우편취급분국 포함)로 모두가 이 중앙우체국으로부터 분가해나간 자손뻘이기 때문이다.
『현재 하루 이용 고객수가 평균 3만명, 연말이면 5만, 6만명에 이르다보니 문턱이 닳아서 남아나지 않아 2∼3년마다 새로 갈아대곤 할 지경』이라고 한 관계자는 귀띔한다.
현대는 PR시대다. 기업체 등의 홍보물과 함께 연말연하우편, 그리고 선거우편물까지 합쳐 가위 우편물의 홍수시대를 맞았다. 중앙우체국에서 취급되는 우편물량은 이들이 쏟아놓고 가는 불량과 다른 지역에서 접수된 물량을 합쳐 하루 평균 45만여통으로 전국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환산하면 집배원 1인당 하루80㎏씩 배당되는 양으로, 특히 올해 같은 연말이면 연하우편물과 선거우편물이 쏟아져 배당량이 하루 평균 1백20∼1백50㎏으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l960년 제19대 중앙우체국장을 역임했으며 체신사가로도 알려진 진기홍씨(79·서울 갈현동)의 말.
『내가 국장으로 있던 당시는 4·19이후였는데 부재자 투표가 국내에서 처음 실시됐어요.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수도권지역으로 오는 우편물은 모두 이곳에서 취급하던 때였는데 물량이 어찌나 많이 밀려오던지 우리 힘만으로 안돼 군에서 인력이 파견돼 밤낮으로 도와줬지요.』

<배달 정확 최우선>
중앙우체국의 이 같은 특수성 때문에 부임하는 국장은 오로지 배달업무의 만전을 제일주의로 여길 정도다.
그러나 우편업무의 편이와 신속처리를 위해 68년 시작, 70년 완성됐던 우편작업 기계화는 실패로 끝난 대표적 사례로 꼽혀 아쉽게 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때로 정부의 공업 육성화 방안에 따라 부피가 큰 소포 등의 우편물을 컨베이어에 의해 자동 운송하는 시스팀을 설치했던 것.
당시 1억5천여만원을 들여 설치한 이 기계는 기술부족으로 고장이 잦았을 뿐 아니라 소음이 너무 커 6개월도 못돼 폐기, 고철덩어리로 전락했다. 우편물량 뿐만 아니라 중앙우체국은 금융 면에서도 취급액이 많았다. 우선 체신예금만도 하루 거래액이 18억원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외 각종 공과금의 연간 수납액은 1조4천7백30억원이나 돼 체신 은행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중앙우체국의 이 같은 업무비중과 위치에 따라 70∼80년대까지만 해도 국장은 부이사관급이 임명돼 재임기간중 별일(?)없으면 승진되는 자리로 통했다.
또 그 이전에는 우리나라체신행정의 초창기부터 행정관 내지 서기관이라도 이른바 무게 깨나 나가는 최고참급 인사가 임명돼 역시 승진을 위해 거쳐야 하는 교량쯤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81년부터 부이사관에서 서기관급으로 낮춰 국장이 임명되고부터 순회보직 또는 정년퇴직을 앞둔 우체국장을 위한 최고위직(?)으로 여기게 됐다
이는 이곳을 거쳐간 국장들의 행적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해방이후 80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30명의 국장중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행정·서기관에서 부이사관 또는 이사관으로 승진, 체신청장으로 발령발기도 했으며 6대 최재호 국장의 경우 나중에 체신차관까지 역임했다.

<직급 낮아져>
그러나 그 이후 5명의 국장이 바뀌었으나 84년 36대 신범식씨(현재 충청체신청장)한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승진하지 못하고 거의 퇴직했다.
이에 대해 한 관계자는 『중앙우체국장 자리엔 본래 승진을 앞둔 인사들이 임명됐어요. 따라서 별 사고 없으면 승진한다는 안일한 타성에 젖어 업무개선보다 무사안일주의로 일관했죠. 그러다 보니 외부에서 볼 때도 자연히 비중이 작아 보여 직급이 낮아진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어요』라고 꼬집어 말한다.
중앙우체국의 초대국장이 과연 누구냐에 대한 문제는 여러 논란이 있으나 진씨는 주저 없이 「홍영식 선생」을 꼽는다.
홍영식 선생이야말로 구한말인 1883년(고종20년)전권부 대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우편행정·통신제도를 관찰한 뒤 귀국, 고종에게 건의해 이듬해인 84년 처음으로 국내에 중앙우체국의 전신격인 우정총국을 지금의 서울 견지동에 설립한 장본인.
이곳에서 우표를 제작해 판매는 물론 송달도 맡았으므로 홍영식 선생이 오늘날로 말하면 초대 체신부장관격 중앙우체국장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해 12월 갑신정변으로 홍영식 선생 등이 제거됨으로써 우정총국도 폐쇄돼 이후 10년간 우편업무가 완전 말살되는 암흑기를 맞는다. 이 같은 암흑기를 거쳐 우편업무가 소생한 것은 순전히 1894년 갑오경장 덕분으로 이듬해인 95년 한성우체사가 정부 칙령에 의해 설립된다.
위치는 지금의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이며 당시의 총책임자는 이기철씨로 직함은 사장이 아닌 우체기수.
어렵게 다시 태어난 한성우체사에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마지막 업무로 기록된 것은 1905년 5월18일로 이로부터 일제에 의한 암흑기가 시작된다.
그해 10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절하기 이전인 4월1일 일본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완전 탈취하기 위해 통신기관부터 장악하고자 통신기관 합병협정을 강제로 체결했다.
당시 한성우체사의 3대째 책임자로 있었던 윤규섭씨와 예하 직원 42명은 그대로 남아 일할 경우 급료가 두 배나 인상되는 좋은 조건에서도 일본인과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끝내 모두 사퇴해 오늘날에도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곧 한성우체사를 경성 중앙우편국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지금의 중앙우체국자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시대의 우편업무중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대표적 탄압수단중 하나였던 것이 바로 독립운동가 등 이른바 요시찰자들과 관련된 인사들의 우편물에 대한 검열. 현재도 중앙우체국 건물 내에 위치하고 있는 우정연구소에서 실시중인 우편검열은 바로 일제의 잔재라 할 수 있다.
일제치하에서의 국내인중 중앙우체국장에 가장 먼저 임명된 사람은 당시 체신부행정관이었던 5대 유승태씨.
유씨는 그때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사법행정시험에 모두 합격했으나 일본인들이 그에 적합한 자리를 주지 않아 중앙우체국장 자리를 스스로 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차례 걸쳐 역임>
해방이후 정부 고위층으로부터도 각별한 신임을 얻었던 국장은 16대(56년)와 18대(57∼60년) 두차례에 걸쳐 이 자리를 역임한 유일한 인물인 고웅씨가 꼽힌다.
당시 중앙우체국은 50년6·25당시 불타버린 건물을 일부 헐어내고 56년1월 새 건물로 지었는데 이승만 당시대통령이 이 자리에 와 기념 치사중 갑신정변 때의 우표에 얽힌 이야기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변 때의 난리통에 우정총국이 불타 우표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종이가 귀할 때라 어떤 사람이 이를 주워다 벽을 발랐다는 것.
뒷날 다른 사람이 아주 헐값에 이를 모두 수거, 큰돈을 벌었다며 이대통령은 우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웅씨는 또 정부기관장으로서 부하직원들로 하여금 노조를 만들도록 강요한 아이러니컬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그때의 일화 한 토막.
58년 고씨가 이응준 체신장관을 수행, 스웨덴에서 열린 국제체신장관회의에 참석했는데 스웨덴 체신장관으로부터 『한국에도 체신노조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 엉겁결에 『있다』고 대답, 귀국해 부랴부랴 정부기관으로서도 최초로 노조를 설립하게 됐는데 그 뒤 이를 본떠 철도노조·전매노조가 만들어졌다.<이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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