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소르망] 오늘 한국서 태어난다는 건 '특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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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26면

한국이 성공적으로 탈바꿈하는 데는 한 세대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내가 1986년 한국을 처음 발견했을 때, 그 경험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검열당한 언론 기사를 읽을 때, 통치자들의 말을 들을 때, 공장을 방문할 때… 도처에서 억압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군대처럼 조직돼 있었다.

국가와 산업을 포괄하는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성장률은 높았지만, 성장은 혁신이 아니라 모방에 기초한 것이었다. 세계가 한국의 수출품을 사는 이유는 품질이 좋거나 한국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값이 쌌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국가 이미지나 브랜드가 없었다. 해외에 알려진 브랜드도 별로 없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전체적인 인상의 중심에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늦춰진 근대화를 앞당기기 위해 심신을 탈진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거환경이나 의복도 꽤나 칙칙해 보였다. 이웃한 중국보다 조금 나아 보였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 살펴보면 반체제 운동가, 학생, 종교인, 그리고 인상 깊은 현대 예술가들에게서 점증하는 개인주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은 억압과 혁명 사이에서 힘든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표현의 수단은 오로지 폭력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무지 혹은 낭만주의 때문에 당시 북한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북한은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모델로 보였던 것이다. 한국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20년에 걸친 훌륭한 경제정책, 탁월한 기업가정신, 세계 시장의 호황, 그리고 활기찬 시민사회가 한국을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한국의 성공은 쉬워 보이지만 다른 나라들이 따라 하기는 쉽지 않다.

20년이 지난 오늘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기에 한국의 오늘이 주는 인상과 과거의 추억을 연결하기가 힘들 정도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도 이는 거의 불가능하리라고 본다. 주요 도시의 외양도 바뀌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는 아름다운 현대도시가 됐다. 한국 여성들은 세련됐으며 적어도 패션에 관한 한 파리나 도쿄의 여성 못지않게 첨단을 걷고 있다. 한국의 현대 예술 갤러리는 뉴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적인 사회가 됐다. 일본보다도 더 개방적이며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정치적으로 훨씬 앞서고 있다.

한국의 이러한 새로운 자유가 보수주의자나 구세대에겐 달가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은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우려할지 모른다. 전혀 그럴 필요 없다. 한국의 새로운 세대는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전 세계에 대해 개방적인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해외 여행을 하거나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체류한다고 해서, 혹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환영한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덜 한국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새로운 세계주의는 예술이나 경제적 창의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의 세계는 한국제 휴대전화, 자동차와 음악을 소비한다. 값이 싸기 때문이 아니라 탁월한 한국의 디자인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세계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문화적 비교 우위’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과 달리 ‘덜 숨막히는’ 환경 속에서 한국민이 보다 더 개인주의적이 됐기 때문에 창의성이 제고됐다. 이는 한국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세계인들을 매혹시키는 문화적 한류나 한국 브랜드들의 성공은 한국 사회 자체의 변모에 뿌리를 둔 것이다.

더구나 한국의 정체성은 서구에서 보기에 더 이상 모호하지 않다. 한국은 더 이상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이제 그 이웃들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 장구한 역사와 강한 개성을 지닌 고유 문명으로 인식된다. 3년 전 문을 연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 문명의 독창성과 불굴의 생명력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현 단계에서 한국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자기 만족이다. 덜 일하고, 인생을 즐기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이 그렇게 해서 안 되는 이유는 한국의 이웃들이 예측하기 힘든 나라들이며 세계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혁신할 수 있는 기량을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증가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암기식 학습을 탈피하고 교육체제를 개선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 학생들은 아직도 유교식 교육방식 때문에 주눅이 든 것 같다. 기강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기강은 창의성의 숨통을 조인다. 한국이 보다 많은 아이디어를 생산하고 혁신을 이룩하려면 교육 현장이 보다 경쟁적이 돼야 한다.

한국은 까다로운 이웃들을 상대로 국제관계를 맺을 때에도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중국은 권위주의 통치에 손발이 묶였다. 북한은 바뀔 수 없는 운명이다. 일본은 화려한 과거의 향수 속에 정체된 것 같다. 한국은 이 지역에서 과감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아시아 공통 화폐는 어떨까? 아시아 민주국가들 간의 군사동맹은 어떨까?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이라는 것은 고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리=김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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