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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쩐의 전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남자는 상처를 남기지만 돈은 이자를 남긴다."

인기리에 방영 중인 SBS TV 드라마 '쩐의 전쟁'의 대사다. 아버지의 사채 빚을 갚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결심하는 여주인공이 하는 말이다. '쩐의 전쟁'은 지하금융 세계를 실감나게 그린 드라마. 사채 빚으로 자살하는 중소기업인, 악랄한 일수찍기,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채 이자의 구조가 생생하게 묘사된다. 30%대 시청률에 영화로 만들어 달라는 팬들까지 나온다. 그간 드라마에서 사채업자란 감초 악역으로 빠지지 않았지만, 이처럼 본격적으로 해부된 것은 국내 영화.TV를 통틀어 처음이다.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총 40여 편에 달하는 TV 대부업체 CF에 출연한 스타들이 도덕성 시비에 휘말렸다. 대부업체 CF 출연 자체야 합법이지만 "싸고 안전하게 돈을 빌려라"고 권유하는 것이 공인으로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이다. 평소 강직한 이미지일수록 타격이 컸다. 비난이 쇄도하자 계약금을 돌려주며 중도하차하는 연예인들이 나왔다. 지상파 3사는 대부업체 CF 방영 중단을 결정했다.

드라마 '쩐의 전쟁'의 인기는 우리 시대 키워드가 '돈'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준다. 돈 때문에 죽고 사는 전쟁 같은 현실의 반영이다. 지난해 18세 이상 영화로는 최대 관객 동원에 성공한 '타짜'도 비슷했다. 전문 도박사들의 귀신 같은 손기술도 흥미로웠지만 결국은 '한탕' '돈벼락'을 갈구하는 인간 얘기였다. 수천만원 현금 다발을 푼돈처럼 판 돈으로 내걸고, 만원권 수천장을 갈퀴로 긁는 도박장 풍경이 펼쳐졌다.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꿀 '돈잔치' '떼돈'의 판타지다.

'쩐의 전쟁'의 인기는 '사채쓰기'가 우리 시대 보통 사람들에게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님을 보여 준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공포스러운 초상이기도 하다.

재정경제부 최근 자료에 따르면 국내 사채시장 규모는 18조원, 대부업체를 이용하는 사람은 329만 명이다. 한국은행 자료는 2007년 1분기 우리 국민의 가계 빚 총액이 586조원을 넘어 사상 최고치라고 밝혔다.

드라마 제목이 과장이 아니다. 바야흐로 온 국민이 '쩐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사채업자에게 쫓기든, 이룰 수 없는 한탕의 꿈을 좇든 마찬가지다.

그저 출연료만 챙기면 어떤 CF라도 마다하지 않는 스타들만큼이나, 서민경제를 박살낸 후 빚더미에 오른 그들에게 '혼자 알아서 해결하라'고 수수방관한 정부도 함께 지탄받아야 할 것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