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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유전쟁] 25. 택시기사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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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상업은행 동대문지점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은행원으로 한단계씩 올라가는 일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흰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맨 전형적인 '화이트칼라' 차림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월급쟁이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에는 가족들의 도움(?)도 컸다. 그 무렵 나는 10여명이나 되는 대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이미 시골에서 터전을 잃은 부모와 서울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동생들도 서울로 올라와 남동생들은 학업을 계속하고, 여동생들은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가 됐다. 은행 대리의 수입으로는 대가족을 이끌고 나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었지만 사람답게 산다고 할 수는 없었다.

장사를 하는 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밑천이 없었다. 나는 흘린 땀의 대가만큼 벌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봤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직업이 택시 운전기사였다. 뛰는 만큼 번다. 그러므로 많이 뛰어서 남보다 많이 벌고 싶은 내 욕심을 채우기에는 택시기사만큼 매력적인 일은 없는 듯했다.

나는 택시기사를 하려고 은행에 사표를 냈다. 1960년 가을이었다. 사표를 내면서 택시기사를 할 것이라고 말하자 은행의 동료.선배들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최고 직장으로 손꼽히던 은행에서 대리로 있던 사람이 굴러온 복을 차버리고 택시기사로 나서겠다고 하니 아무도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내 행위가 모든 은행원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택시기사라고. 에이, 농담도. 무슨 좋은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 모양인데, 잘 해 보라고."

"좋은 직장으로 스카우트됐겠지. 가서 내 자리도 좀 알아봐 주게."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뭐라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은행을 나왔다. 그리고 곧장 택시기사로 취직했다.

대부분의 택시회사는 지입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차량 한대 갖고 있지 않았던 나는 하루 수익금 가운데 사납금을 제외한 나머지를 챙겨가는 '일당 기사'였다.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은 통금시간을 빼고 하루 20시간이었다. 나는 20시간을 40~50시간처럼 일했다.

나는 택시가 힘겨워 주저앉고 싶어할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택시기사의 수입은 은행 대리에 비해 훨씬 많았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마라톤의 긴 코스는 단거리 경주의 집합이다. 나는 하루하루를 단거리 경주하듯 최선을 다해 뛰고 달렸다. 택시를 타려는 사람의 바쁜 호흡에다 나의 호흡을 일치시켰다. 처음에는 그저 열심히 달렸으나 점점 요령이 생겼다. 시간대별로 사람이 몰리는 장소를 정확하게 짚어 효율성을 높였다.

대부분 택시기사의 꿈은 '내 차'를 갖는 것이다. 나는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으나 대가족을 부양하고도 택시기사 생활 2년 만에 택시 한대를 갖게 됐다. 차주 겸 택시기사인 자영업자의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달리기 시작한 차량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내 차를 가진 뒤에도 나는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렸다. 택시기사를 시작한 지 6년이 지나자 내 소유의 택시가 다섯대로 늘어났다. 소규모지만 택시회사 경영주가 된 것이다. 7년간 근무한 은행을 떠날 때 나는 빈손이었다. 그러나 택시기사 6년 만에 사업가로 변신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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