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출판사 첫 책] (끝). 소나무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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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출판사가 출판 등록을 한 1987년은 시국이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유재현 대표(사진)는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라는 어느 가요의 노랫말이 마음을 울리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는 정치 상황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그것도 칼 마르크스의 연구 논문을 번역 소개한 것이 첫 책이었으니 그때 소나무 출판사는 분명 이념 출판사의 하나였다.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은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을 빌려 자신의 유물사관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려 쓴 논문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프랑스 내전'을 번역해 묶은 책이다. 초판의 표지에는 옮긴이의 이름이 없다.

책의 안쪽 번역 판권에 관한 부분에 허교진 옮김으로 돼 있었다.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하던 옮긴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명이었다. 가공이라는 뜻으로 허와 가르칠 교, 진리 진을 엮어 만든 이름이었다.

유대표는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이런 작은 일에도 비장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임지현.김용우씨 등 이 책에 공들인 역자들이 자기 이름을 찾은 것은 1993년 재판을 찍으면서였다.

이 책이 탄생하기까지 가장 힘든 작업은 번역이었다고 한다. 원전의 내용이 대학원생들이 옮기기에는 좀 버거웠던 것이다. 등장 인물이 수없이 많은 데다 정파도 정말로 다양했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 당시의 상황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바람에 누가 누구 편인지 파악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마르크스의 글쓰기 또한 '이 사람이 일부러 자기 주장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러는 게 아닌가'라고 불평할 정도로 고약했다.

'프랑스 혁명사 3부작'은 출판 등록 2년 전부터 미리 번역 작업에 들어간 터라 출판 등록 2주 만에 독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초판 2천부가 1주일 만에 다 팔렸다.

당시 소나무 출판사에는 별도의 배송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출판사 직원들이 모두 나서 버스와 전철을 타고 다니며 각 서점에 책을 날랐다.

이 책은 현재 거의 팔리지 않고 있으나 출판사에서는 역사를 연구하는 전공자들을 위해 내년에 개정판을 낼 계획이다.

소나무 출판사는 95년 이후로는 동양학과 공동체.환경에 관한 책을 많이 내고 있다. 소흥렬 이대 철학과 교수의 '문화적 자연주의'와 최규철씨의 'ET 할아버지와 두밀리 자연학교'가 대표적인 책이다. 법적으로는 개인회사로 돼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1백50여명의 출자로 움직이는 공동체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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