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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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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2002년 '현대문학' 6월호를 통해 등단한 박형서(31)씨가 등단작이자 표제작인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 등 단편 9편을 묶은 첫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펴냈다.

책으로 묶인 9편은 지나치게 쉽거나 그 반대다.

'사막에서'는 주인공 '나'가 인생을 은유한 것으로 짐작되는 사막을 건너가는 가운데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여러 기억과 상념을 따라간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나는 외면하고 싶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불분명한 관계의 그와 동행 중이다.

'작별'과 '하나, 둘, 셋'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조차 어림잡기 힘들 정도다. 종잡을 수 없는 진술의 연쇄에서 의미있는 이야기 구조를 잡아내기 어렵다.

문학평론가 우찬제씨는 해설에서 "박형서의 이야기장(場) 안에서는 이야기의 연속성은 대체로 보장되지 않고 사건이나 행동의 인과론도 어지간히 해체돼 있으며 현실적 개연성은 파문에 가깝게 방치된다"고 분석했다.

연속성.인과론.개연성이 살아있는 작품들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하지만 '쉬운' 이야기가 진행되는 지평도 마냥 현실에 밀착된 것은 아니다.

'하얀 발목'은 유난히 잠이 많아 꿈을 자주 꾸는 아내를 둔 재혼남의 이야기다. 아내 역시 전 남편과 사별한 처지다. 아내의 투명한 피부, 특유의 매혹적이고 노곤한 향에 매혹된 남편은 퇴근해 돌아올 때 아내가 잠들어 있어도 불만이 없다. 잠에서 깨어난 아내가 겨우 저녁을 차려주고 다시 잠에 빠지면 떨어진 단추를 손수 달곤 하는 남편은 아내에 대한 보호본능에서 욕정이 발동해도 잠든 아내를 깨워 성교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 금이 가는 것은 아내가 꿈속에서 봤다고 말한 남편 주변의 인물들이 차례로 죽어나간다는 사실을 남편이 의식하면서부터다. 우물에 몸을 던져 하얀 발목만 내놓은 채 숨진 어머니는 남편의 꿈속에 나타나 아내와 재혼하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자신이 아내의 꿈속에 나타날까 두려워 한동안 가출했던 남편은 수면발작증에 빠진 아내를 병원으로 옮기고는 바늘로 아내의 안구를 찔러 실명케 한다. 그러나 잠시 후 남편은 자신의 귀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쥐어뜯는다. 저주의 근원은 아내의 눈이 아니라 아내의 꿈을 귀담아 들은 자신의 귀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공포소설 같다.

'불끄는 자들의 도시'는 경이로운 인명 구조 실적을 자랑하는 Y시의 소방대를 잡지사 기자가 취재하는 과정을 그렸다. 기자는 놀라운 실적 뒤에는 소방관들의 엽기적인 식인육 습관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심하게 화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해도 잘라낼 게 뻔한 화재 피해자들의 허벅지나 팔뚝을 소방관들은 슬쩍 슬쩍 뜯어먹어온 것이다.

카니발리즘을 다뤘지만 소설은 황당할지언정 끔찍하지는 않다. 작가의 기지와 순발력은 반짝거리는 웃음을 자아낸다. 황당과 웃음이 버무려진 소설의 재미는 배가된다.

쉬운 작품들에서 작가의 의도가 현실을 환기하거나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허구적인 구성물을 제시해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목적은 달성된 것 같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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