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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영조에 죽임당한 비운의 사도세자

중앙일보

입력

사도세자의 묘 융릉

아버지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27세때 뒤주(쌀을 보관하는 나무 궤짝) 속에 갇혀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 그가 장인 홍봉헌에게 보낸 눈물어린 편지가 공개되면서 새삼 사도세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조선시대 영조의 둘째 아들로 큰 아들 경의군이 10세때 사망하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세때는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맡기도 했다. 조숙하고 총명한 데다가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언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호기심이 많아 지난날의 정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기존 질서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위협을 느낀 영조의 후궁 문숙의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노론의 강경파들이 질투와 두려움으로 그를 견제하기 위해 영조와 사도세자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1761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순행하고 돌아오자 반대파들은 왕세자의 체통을 잃게 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시작했다. 결국 서인(庶人.평민)으로 폐하게 하고 끝내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게 하였다. 영조는 노론을 견제할 만한 현실적 힘도 갖추지 못한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경우 큰 반란이 일어나 조선왕조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조는 마침내 1762년(영조 재위 38년) 창덕궁 내 휘령전 앞뜰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했다. 이에 사도세자는 머리를 땅에 찧어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허리띠로 목을 졸라매기도 했다. 신하들이 자결을 만류하자 화가 난 영조는 큰 뒤주를 가져다 사도세자를 그 안에 가두었다. 한여름 밀폐된 뒤주 속에서 8일간 물 한 모음 마시지 못한 채 사도세자는 목숨을 거두었다.

사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정신이 들어 놀란 영조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서'사도(思悼.생각하고 슬퍼한다)'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다.

영조는 그가 쓴 아들의 묘비문에서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여러날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비통해 했다.

종래에는 사도세자가 몹쓸 병에 걸려 미친 행동을 하여 죽음을 재촉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었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혜경궁 홍씨의'한중록'에 자세히 묘사돼 있다.

사도세자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즉 영조의 손자는 11세였다. 후에 조선조 22대 국왕으로 즉위한 정조대왕이다.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아내다.

정조는 즉위 후 10일만에 사도세자의 호를'장헌(莊獻)'으로 높여 부르고 사도세자의 묘소를'영우원'으로 높여 부르도록 했다. 사도세자의 묘소는 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인 배봉산에 있었다. 정조는 즉위 13년만에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이장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세종대왕의 묘소'영릉'과 함께 국내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만들어'현륭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현재 경기 화성시 태안읍에 있는 융릉이다. 1899년 고종 때 사도세자는 다시 장조(莊祖)로 추존됐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사도세자의 편지를 보면 그가 우울증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또 장인에게 부탁해 조선 팔도를 그린 지도를 보며 나라를 걱정한 것으로 보인다.

김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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