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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진복기 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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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진복기는 한국 대통령선거의 양념이었다. 군부정권과 민주세력의 숨막히는 대결에서 웃을 수 있는 여유를 선물했다. 실제로 출마한 것은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의당 후보로 12만2914표(1.0%)를 얻은 게 전부지만 평생 대통령 후보였다. 97년까지 대선만 닥치면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기사를 써 달라고 졸랐다.

"…떴다 봐라/정의당 당수/코밑의 팔자수염/그 갈색 얼굴 가득한 실없는 웃음/진복기 후보가 나타난다/반드시/…그렇게 죽느냐 사느냐의 혈전(血戰)인데/그런 혈전 한구석에서/빙그레 웃음 스며 나오는 후보가 있다…."(고은, '만인보')

역대 선거에서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수많은 대통령 후보들이 흘러갔다. 그런데도 진복기는 군소 후보의 대명사로 남아 향수를 자극한다. 정치적 꼼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은은 "어떤 위엄도/어떤 적의도 없는/이빨 누런 당수의 웃음이 고작이었다"고 했다.

13일까지 중앙선관위에 올 대통령선거 예비후보로 등록한 사람은 55명. 두 명은 자격 미달로, 한 명은 사망으로 등록이 취소된 결과다. 이들이 직업란에 써넣은 걸 보면 정말 다양하다. 보모.역술인.목사.승려.야채상.문구상.교수.농민.노동자.부동산 임대업자.청소부.청원경찰.주부…. 여기에 아직 등록하지 않은 소위 범여권의 예상 후보를 합치면 70명에 이른다. 김근태 의원이 지목한 한명숙.정동영.천정배.김혁규.이해찬.손학규.문국현에 신기남.강운태.유시민.김원웅.신국환…범여권 후보만 한 다스가 족히 넘는다.

5억원이나 되는 기탁금을 내고 끝까지 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도 무모하게 달려드는 이유는 '이름 알리기'다. 예비후보 중에는 총선이나 지방선거에 떨어졌던 사람이 많다. 당내 지분을 확보해야 하는 계파정치의 이해관계도 있다. 막판 흥정을 노린다. 차기를 노린 정치적 몸집 불리기도 있다. 하지만 자칫 '짝퉁 진복기'가 될 수 있다. 쇼트트랙처럼 팀플레이도 가능하다. 승산 없는 후보가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악역을 맡아 주면 동료 후보가 편해진다. 벌써 그런 조짐이 보인다.

그렇게 따져도 후보가 너무 많다. '출마는 개나 소나 다 한다지만…'이라고 '이순재송'을 바꿔 불러야 할 판이다. 토론도 안 되고, 정밀 추적도 어려워진다. 김근태 의원은 지분마저 포기하고 물러섰다. 고건.정운찬과도 다르다. 아름다운 퇴장이라 할 만하다. 그보다 못하다면 이제라도 물러서는 게 유권자를 돕는 길이다. 아무리 용써 봤자 진복기만 하겠는가.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