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다랭(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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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르트르와의 계약결혼으로 유명한 시몬 보부아르의 자전적 소설중에 「레망다랭」이 있다. 중국의 고관을 뜻하는 「망다랭」이 프랑스어로는 특권적 지식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이 소설속에는 보부아르와 가까웠던 당시의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이 대거 동원된다.
나치 독일이 물러나고 프랑스가 광복을 맞은 4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르트르·메를로 퐁티·카뮈를 연상하는 당대의 영향력 있는 좌파 지식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진보적 잡지 『희망』을 편집하며 사회주의 세계의 희망찬 미래를 설계한다.
편집장 페롱은 어느날 소련에 거대한 강제수용소가 있어 수많은 비판자와 정치범을 구속해 무참히 죽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진상을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당수 동료들은 정보 자체는 충격적이지만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맞선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를 꿈꾸었던 많은 지식인들이 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하나씩 전향하거나 이탈하게 된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40년대에 겪었던 사회주의 심취,그리고 전향의 과정을 우리는 아직도 눈앞의 현실로 보고 있다는데 서글픔을 느낀다. 중부지역당 간첩사건으로 연루되었던 당사자들이 현장검증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후회와 참회의 한숨,주사파의 대부로 80년대를 주도했던 운동권학생이 검찰과 재판부에 보낸 반성문,그리고 간첩단을 파견한 북에 대해 항의와 사과를 요구하는 재야단체의 움직임을 보면서 우리도 이젠 뒤늦게나마 한 시대를 마감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갖기도 한다.
「나의 주체적 신념은 초라한 환상이었고 자주적 애국사업은 북한의 지령에 따른 반국가적 간첩행위에 다름아니었다는 비참한 결론은 수사관의 판단에 앞서 스스로의 자각이었다」는 황인욱씨의 반성은 비록 뒤늦은 판단이었지만 퇴락하는 주사파 이데올로기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 의미를 부여한다.
굳이 남침을 북침으로 봐야하고 1인세습의 독재정권을 주체사상의 낙원으로 보아야만 하는 슬픈 지식인,망다랭이 이젠 더이상 나오지 않는 지식인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권영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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