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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미병 재판권 행사하라(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경찰이 한국여성의 살해용의자인 미군병사를 붙잡고도 기초조사조차 하지 않은채 미군쪽에 넘겨주어 버린데 대해 국민의 분노가 일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찰은 한미주둔군 협정에 보장돼 있는 엄연한 권리를 무책임하게 포기했다. 살인방법이 잔인하기 짝이 없는 중범죄자이고 증거물과 목격자까지 있어 진범이 거의 확실한 용의자를 체포하고도 미군이 신병인도를 요청하자 즉시 넘겨주어 버린 것이다.
경찰의 이러한 무책임한 권리의 포기는 한미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현재 동두천의 13개 시민단체,택시기사들,그리고 전국 규모의 각종 단체들이 정당한 수사권·재판권의 행사를 촉구하고 있는데 경찰이 사건을 정당히 처리했더라면 일이 이같이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행 한미주둔군 협정이 지니고 있는 불평등한 요소의 제고도 필요한 일이나 그 이전에 필요한 것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줄 아는 주체성의 확립이다. 이미 확보된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협정개정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경찰이 한미주둔군 지위협정상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 것이 단순한 실수는 아닐 것이다. 미군범죄에 대한 이제까지의 처리방침이 그런 쪽이었기 때문에 타성적으로 그렇게 처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정된 한미주둔군 지위협정이 발효된 지난 91년 1월4일 이후에도 1천41건의 미군범죄중 우리가 재판권을 행사한 것이 단 14건 뿐이었고 올들어서는 이제까지 단 한건의 재판권 행사도 없었다는 통계가 그동안의 분위기를 웅변해주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검찰과 경찰은 미군범죄에 대한 명확한 수사방침을 확립해 그 세부시행 지침을 일선 경찰서에 시달해야 한다. 미군이라 해서 특히 관대할 필요도 없고,엄히 다스릴 필요도 없다. 어디까지나 협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집행하면 그뿐인 것이다.
일선 경찰의 경우는 협정에 대한 법적 지식의 부족과 언어소통의 불편 때문에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경찰서마다 법규정 및 그에 대한 해설,그리고 처리절차를 비치하게 하고 통역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도 갖추어야 한다.
당면한 과제로서는 검찰은 하루 빨리 용의자인 미군병사의 신병을 인도받아 재판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미8군측도 한국경찰에서 요구한다면 넘겨줄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으니 문제해결에 아무런 장애도 없다.
현행 한미주둔군 지위협정은 장차는 일본이나 서독이 미국과 맺은 협정내용의 수준으로 다시 한번 개정될 필요가 있다. 한미간의 평등한 법적관계와 법적집행이야말로 두나라간의 갈등과 마찰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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