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어느 지하철안에서 생긴 일(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며칠전 저녁 서울 1호선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술기가 약간있는 세명의 젊은이가 시청역에서 탑승했다. 차안에서도 상소리를 하며 거들먹거리더니 앉아있던 한 남자 대학생에게 이유없이 시비를 걸었다. 위험을 느낀 대학생이 기방도 들지 못한채 일어나 뒷걸음질을 하며 피하자 세명중 한명이 따라와 주먹으로 얼굴을 갈겼다.
대학생은 이내 코에서 피를 쏟으며 어쩔줄 몰라했다. 느닷없는 사태에 처음엔 승객들이 모두 어리둥절했으나 피를 흘리는 대학생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는 모두들 사건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다.
행패를 부린 세명의 청년들은 코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도 계속 거들먹거렸다. 만원상태는 아니었으나 퇴근길이라서 승객들이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승객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해 40대 후반의 한 여인이 겨우 나서 피를 흘리는 대학생에게 다른 칸으로 피할 것을 권하면서 놓고온 책가방을 챙겨 주었다. 그를 보고 한 승객이 일어나 계속 피를 흘리는 대학생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그 승객은 젊은 여자였다. 건장한 젊은 남자도,나이 지긋한 승객도 많았으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로 「경찰에 신고해야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지하철은 종각역도 지나 종로3가역에 닿았고 술기있는 세 청년은 지하철문에 발길질까지 한뒤 여유만만하게 내려 자기들끼리 희희닥거리며 걸어갔다.
참으로 지어낸 이야기처럼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더 기가 막히는 건 그들의 행패보다도 많은 시민들이 그것을 눈앞에 보고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폭력이 누구도 아랑곳없이 거침없이 행사되고 그러고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않는 현실이 전적으로 시민들의 책임일 수는 없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의 하나다. 그러나 그것으로 아무 행동도 못한 시민들의 책임이 면제될 수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그 행패를 저지하려 했거나 그들을 잡아 경찰에 넘기려 했다면 그도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런 불의에 눈감아버린다면 그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언젠가 우리중 누군가가 그런 봉변을 당해도 역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피해 학생 또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먹이 법보다 가깝고 체념해버린 것이었을까. 폭력과 법,그리고 실종된 시민정신을 되새겨 보게 하는 씁쓸한,그러나 의미깊은 경험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