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정치계절의 경제공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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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선거철은 경제학자에게 시련의 계절이다. 정치인이 더 높은 성장, 더 좋은 분배, 더 후한 복지의 화려한 공약을 제시할 때마다 경제학자는 그 비용을 걱정하고 부작용을 경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선거철이 일부 경제학자에게 기회의 계절로 바뀐 것이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 대선에는 후보 캠프에 많은 경제학자가 참여한다. 이 '관변 경제학자들' 덕분에 각종 경제공약에 경제논리의 외피가 씌워진다. 그러나 부분으로는 그럴듯한데 전체로는 이상한 그림이 나오곤 한다. 이른바 '먹물'들이 대선 후보의 차별화 전략과 정치판의 튀는 성향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거나, 스스로 정치판의 성향에 적극 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도 이런 상황은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유력한 대선 후보인 이명박씨의 7.4.7과 박근혜씨의 줄.푸.세를 보자.

7.4.7은 연평균 7%대 경제성장을 통해 10년 뒤 1인당 소득 4만 달러를 이루고 세계 7대 경제강국으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줄.푸.세는 세금과 정부지출을 '줄'이고 각종 규제를 '풀'며 법질서를 바로 '세'워 7% 경제성장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둘 다 의욕적으로 7%대 성장을 내세운다.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5%대라고 학계 전문가들이 추정하는데 이를 태연하게 무시하고 있다.

물론 잠재성장률의 추정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다. 정부가 기업의 기를 살리고 법치를 세우며 새 성장동력의 발굴을 적극 지원하면 분위기가 일신해 잠재성장률 자체가 높아진다. 그동안 잠재성장률만큼 성장하지 못한 데 따른 반등효과도 기대된다. 이 모든 가능성을 감안할 때 한두 해에 7% 이상 성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연평균 7%의 성장은 꿈 깨야 한다. 5년 전에 노무현 후보가 '오기'로 7% 성장목표를 제시한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논리수준이다.

10년 뒤 1인당 소득 4만 달러와 세계 7대 경제강국은 목표라기보다 희망사항이라고 이명박씨가 밝혔다고 한다. 모처럼 경제논리에 맞는 발언이다. 현 정부의 수도이전 공약 못지않게 문제투성이인 대운하 공약도 경제논리로 보면 폐기하는 게 옳다.

규제완화와 법질서 확립은 우리 경제와 사회의 선진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정부지출과 세금을 줄인다는 것은 수많은 좋은 명분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정책이다.

현 정부처럼은 아니더라도 복지를 포함한 광의의 사회개발지출 비중은 꾸준히 늘릴 수밖에 없다. 교육.국방.통일 관련 등의 지출도 마찬가지다. 물론 방만한 정부지출을 줄여야 하지만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외환위기 이후 분배상태가 꽤 나빠졌다. 세계화시대에 소득과 부의 격차는 커지게 되어 있다. 대중영합적인 현 정부가 양극화를 해소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해소하기는커녕 완화하기도 아주 어렵다. 이런 때에 사회통합과 고통분담의 차원에서 가진 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늘어나는 세금을 흔연히 부담케 하는 '큰 정치'가 필요하다. 세금을 줄인다면 최소한의 형평성과 효율성도 결여된 종부세를 재산세로 흡수.폐지하고 준조세를 줄여야 한다.

머지않아 범여권과 민노당의 후보도 정해지면 얼마나 화려하고 반시장적이며 대중영합적인 공약들이 쏟아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관변학자들도 작은 정부, 큰 시장, 적절한 사회복지, 대폭적인 대외개방, 좋은 사회하부구조가 새 정부의 경제철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국가경쟁력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세계화시대에 경제 이외 분야의 공약도 이런 경제철학에 맞게 조율되어야 한다. 대선에 승리하면 이런 철학과 안 맞는 공약들을 폐기하는 것이 관변학자들의 임무다. '선거용'과 '국정용'을 가리는 교통정리도 못 한다면 본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 현실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노무현 정부에 꽤 많은 학자가 참여했지만 아마추어 국정운영만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안국신 중앙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