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 부장|「무소불위」의"대통령 분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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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5·16쿠데타와 더불어 창설된 중앙정보부(KCIA)가 국가안전기획부(NSP)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른지 31년 5개월이 됐다.
「남산」으로 통칭되며「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 무소불위한 권부는 초대 김종필 부장(현 민자당 대표)을 비롯, 18명의 부장을 배출했다.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에는 9대의 중정 부장(서리 2명·직대 1명 제외)이,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집권 12년간 9대의 안기 부장이 나왔다.
이들 남산 부장들은 육군장성출신들이 많았지만 출신여부를 떠나 일치되는 것은 당시 집권자의 절대적 신임을 방은 충복이었다는 점이다. 이 기관의 기능이 표방하는 국가안보 못지 않게 정권안보에 기울어져왔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늘 이 막강한 자리를 청와대 비서실장·경호실장·수경사령관·보안사령관을 시켜 견제해왔다. 때문에 권력기관간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관계가 유지되어 왔고, 이것이 대통령의 통치 술이자 힘의 큰 기둥이었다..
박 대통령은 김형욱 부장을 통해 공화당 의장이 된 김종필 초대부장의 정치적 부상을 눌렀고, 다른 한편으론 이후락 비서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을 시켜 김형욱 부장을 감시했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부장에게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김재규 부장에게는 차지철 경호실장을 라이벌로 붙여 이따금 박치기도 시키고 충성경쟁도 받았다. 이 같은 견제장치에도 불구하고 남산부장들은 대통령의 신임을 배경으로 방대한 조직·자금을 주무르며 한때를 풍미하는 인상을 주었다.
정보부가 안기부로 이름이 바뀐 것은 김재규 부장이 박 대통령을 저격하고 보안사중심의 신 군부가 권력의 핵심에 등장하면서였다. 일그러진 남산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이름을 바꾸면서 정부 각급 기관에 대한 감독기능을 박탈했지만 전두환 대통령 역시 안기부를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이용, 여전치 힘을 갖게 했다.
80년「서울의 봄」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정보부장(서리)을 겸직, 응징차원에서 3백여 명의 남산간부들을 숙청하는 한편 법을 개정, 중정의 정보 및 보안업무「조정·감독」을 「기획·조정」에 국한토록 조치한바 있다.
6공에 이르러서는 정권의 취약성으로 인한 잦은 부장의 교체와 모든 분야의 민주화 열기 속에 인사에 불만을 품은 안기부요원들이 연판장을 돌리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안기부의 기력이 쇠퇴한 것은 사실이며 노 대통령의 9·18선언이후에는「국내정치관여 금지, 대공업무 전념」을 자임해야하는 등 지금까지의 위세는 많이 사라졌다.
이렇듯 남산은 정권의 강약과 함께 부심을 거듭해왔다. 그럼에도 변치 않고 있는 것은 대통령의 부장에 대한 전폭적 신뢰와 지원이다.
이들 부장의 출신을 보면 18명의 부장과 2명의 서리(이희성·전두환), 1명의 직대(윤일균) 중에서 불과 4명만이 관료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군 출신이다.
이는 남산의 성격, 집권자와의 관계 등을 웅변해주는 부분으로서 지난 30여 년 간의 집권자들이 군 출신이라는 점과 직접 관련이 있다.
특히 군을 동원, 비정상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박·전 대통령은 물론 노 대통령까지도 정권유지에 있어 군의중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따라서 군을 잘 아는 자신과 성분을 같이하는 이들을 기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역 쿠데타」차단이라는 중정 창설의 목적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군 출신은 중정 시절 초대 김종필(준장) 2대 김용순(소장) 부장 등이 아예 현역부장이었으며 3대 김재춘(소장), 4대 김형욱(준장), 5대 김계원(대장), 6대 이후락(소장), 8대 김재규(중장)·서리 이희성(대장) 직대 윤일균(준장)·서리 전두환(대장), 9대 유학성(대장) 등이었다.
안기부로 개편된 이후 초대 유학성, 3대 장세동(중장), 4대 안무혁(준장). 6대 박세직(소장), 8대 이상연(대령), 9대 이현우(중장) 부장 등이 군 출신이다.
이상연 부장의 경우는 유일한 영관 장교로 부장 임명 전 내무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나 보안장교로 잔뼈가 굵은 점등을 감안할 때 군 출신으로 분류되는 게 타당할 듯 싶다.
이들 군 출신 부장들은 또 대통령의 거사동지 내지 육사 동기생·동향·군 시절 직속부하 등의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몇 안 되는 관료출신 부장들도 대통령과의 특수관계라는 점에서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
4공 시절의 유일한 비 군 출신 7대 신직수 부장은 군법무관출신으로서 이미 박 대통령과 군 시절에 깊은 인연을 맺었고 검찰총장·법무장관을 지냈다. 안기부장으로서 5대 배명인 부장이 법무장관, 7대 서동권 부장이 검찰총장을 지내 검찰출신이 비 군 출신 부장의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노신영 부장만이 외무장관 출신이었다.
김종필 부장은 집권 공화당 의장으로, 노신영 부장은 국무총리로 옮기는 행운을 잡았고 김계원·유학성·박세직·서동권 부장 등도 크든 작든 시혜를 누렸다. 기리고 이들 중 서너 명은 차기 대권을 꿈꿀 만큼 배려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 시해사건 주범으로 사형 당한 김재규를 비롯, 못된 짓을 밥먹듯 했던 김형욱 부장은 생사조차 묘연하다. 김재춘·장세동 부장은 부장직을 떠난 지 불과 얼마 뒤 구속됐으며, 박 대통령 후계자로까지 얘기되던 이후락 부장은 해외로 도피했다가 옛 부하들에게 끌려오는 신세가 됐다. 김계원 부장도 종국에는 구속되고 대장계급까지 박탈, 이등병으로 강등된 바 있다.
한마디로 그 말로를 장담할 수 없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로야 어찌됐건 재임 중의「호사」는 대단한 게 틀림없는데 재임기간은 말로만큼이나 제각각 이다.
전반적으로 박 대통령시절 부장들이 장수했으며 6공 들어서는 단명했다.
김형욱 부장은 6년 3개월을 재임, 최장수 부장으로 기간만큼 많은 악업을 쌓았고 이후락·신직수 부장이 3년, 김재규 부장이 2년 10개월 등으로 비교적 장수했다. 다만 2대 김용순 부장이 역대부장을 통틀어 가장 짧게 재임(l개월 여) 했는데 이는 당시 최고회의 내부의 권력다툼에 기인한다.
5공 시절 노신영 부장이 2년 8개월, 장세동 부장이 2년간 재임했는데 정권 과도기의 유학성·안무혁 부장은 역할이 한정되었었다.
6공 들어서는 2년 8개월을 재임한 서동권 부장이 있긴 하지만 배명인·이상연 부장 각 7개월, 박세직 부장 8개월 등으로 단명했다.
현재의 이현우 부장은 고작해야 4개월이 될 것이므로 노 대통령은 5년 재임기간 중 6명의 부장을 생산한 게 되는데 6공 인사정책의 혼선과 약체 정권의 반증이기도 하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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