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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칼럼] 도나 노비스 파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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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1월 21일 국립경찰병원 박재형 의사는 이런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제발 쇠파이프로 얼굴만 가격하지 말아주세요. 매일매일 전.의경 애들을 꿰매댔더니 살덩어리 꿰매는 것도 무감각해져 천 쪼가리 꿰매는 것 같습니다." 오전 4시30분 그의 표현대로 "주저리 주저리 짖어댄"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제발 돌덩어리를 입 주위에 던지지 말아주세요. 치아가 부러져 밥도 못 먹고, 죽 얻어먹을 데도 없어 계속 굶고 있습니다. 정말 불쌍합니다."

*** 돌맞아 경찰이 묵사발 되는 현실

11월 28일 경기도 용인의 구성성당에서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음악회가 열렸다. 국립경찰교향악단의 실내악 주자들이 비틀스의 감미로운 '예스터데이'를 연주하는 도중 아니 이게 웬일이람. 난데없는 장대비가 천막 지붕을 두들기는 바람에 현악 선율이 '타악'으로 변하고 말았으니. 청중이 이렇게 무참할 때 연주자의 심정이 오죽했으랴? 아이고 하느님도 조금만 참으시지요.

하늘의 변덕에 위로도 할 겸 그들에게 다가갔다. 군 복무를 경찰대학에서 대신하는 학생들로서 민경친선(民警親善) 활동의 하나로 이 행사에 참석했단다. 민간이 던진 돌에 경찰의 얼굴이 묵사발되는 '반친선' 현실에 대해 정태현씨는 "돌을 던질 이유가 있겠지만 돌을 맞을 이유는 없다"고 분연히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움찔했다. 이제까지 나는 돌을 던질 이유는 열심히 찾았지만 돌을 맞는 이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1980년대 돌팔매와 최루탄이 대학가를 누빌 때 나는 단연 돌팔매 편이었다. 거기 무슨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선생은 그저 학생들과 '한패'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가 부러지고 입이 찢어져서 밥도 못 넘기는 경찰의 고통을 내 어찌 꿈이나 꾸었으랴.

세상을 사노라면 한편도 생기고 우리와 저들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애초에 내편 네편으로 가를 대상이 아닌데도 우리와 저들, 동지와 적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것은 정녕 불화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음험한 계략이다. '군 복무 하려다 줄 잘못 서 전.의경으로 가고, 위에서 폭력 시위 진압하라고 떠밀어서 방패 들고 떨고 있는' 그들은 정녕 네편도, 저들도, 적도 아니다. '헬멧을 쓰면 보호가 되니까 턱 아래쪽에서 입술 쪽으로…그것도 쇠파이프로' 후려치는 행위는 단순히 시위 저지선을 뚫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표출이다. 그것은 민주 쟁취와도, 약자의 저항과도, 소수 집단의 이익 관철과도 무관한 그저 악의의 폭력으로 비칠 따름이다. 폭력이 어디 그것뿐이랴. 생활비까지-목숨까지-빼앗아가는 회사의 손배소(損賠訴) 강행도 있고, 한껏 부려먹은 외국인 근로자를 불법 체류로 내쫓는 처사도 예외가 아니다.

본지가 마련한 이문열씨와 황석영씨의 대담에서 "이제 우리 누구를 편들지 맙시다"라는 다짐이 줄곧 귓전을 맴돈다. 양인 공히 어느 한 편의 맹주가 될 법하기에 그 말이 더욱 실감났는지 모르겠다. 맹주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맹주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우리'와 '저들'로 편을 가르고 대결과 승리를 외치는 어떤 장면이 한겨울 냉기보다 스산했다. 가뜩이나 '차떼기' 돈 정치에 질리고 혹독한 불경기에 지친 마음들 아닌가. 말의 상처는 칼의 상처보다 깊다. 칼이 포교(布敎) 수단이던 모로코의 격언이라는데 말의 위험을 칼보다 앞세운 그들의 혜안이 놀랍다. 쇠파이프가 만들어낸 상처들을 쇠파이프로 고칠 수 없다면, 미상불 그 치료는 말이 맡아야 한다. 그런데 그 말이 자꾸 칼처럼 베고 자르고 찔러서 탈이다.

*** 칼의 상처보다 깊은 말의 상처

하느님, 천국과 달리 이 세상에는 돌을 던질 이유도 있고, 맞을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맞을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계속 맞고 있으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없습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주시거나 아예 맞을 사람들을 없게 하십시오.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상대의 잘못에 선입견을 갖는 것이라고 칼릴 지브란은 말했습니다. 부디 새해에는 분노와 선입견으로 남의 잘못에 팔매질부터 하지 않도록, 칼보다 더한 말의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시오(Dona nobis pacem). 그리고 구성 성전을 지을 지혜와 용기도 함께.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