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연예인과 마약 광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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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뉴스위크 최신호는 할리우드 여배우 세 명을 금주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린지 로한, 니콜 리치, 패리스 힐튼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고뭉치들이다. 아역 배우 출신의 린지는 교통사고를 낸 자동차에서 코카인이 나왔고, 가수 라이오넬 리치의 딸인 니콜은 술 마시고 약물을 복용한 채 운전하다 붙잡혔다. 힐튼 호텔의 상속녀 패리스는 음주운전에 따른 집행유예 기간에 과속 운전을 하다 45일 구금형을 받고 펑펑 울며 감옥에 갔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뉴스위크는 이들을 상습범(repeat offender)이라 부르며 "언제나 보지 않게 될까" 경멸한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연예인들은 '범생'인 편이다. 간혹 음주운전이나 대마초로 걸리는 이들도 있지만 최소한 자숙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려 애쓴다. "뭐가 잘못이냐" 대들거나 공권력을 조롱하듯 범법을 계속하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할지 모른다.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요즘 연예인의 도덕성이 특히 문제 되고 있는 곳이 있다. TV 광고다. 그중에서도 대부업체 광고다. 인기 배우나 개그맨들이 나와서 "무이자" "즉시 대출" 같은 솔깃한 문구와 대부업체의 전화번호를 외쳐댄다. 하지만 그들 대부업체가 실제 대출조건이 까다롭고 이자는 최고 66%에 이르는 '파산의 지름길'이라는 걸 모르는 소비자는 별로 없다. 출연 연예인들을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너희는 거액의 출연료 받고 우리는 빚더미에 앉으란 말이냐"는 성토가 인터넷을 달군다. 분위기가 안 좋다 보니 광고에서 중도하차하는 이도 있지만 억대의 출연료는 뿌리치기 쉬운 유혹이 아니다. 그래선지 그림자와 목소리로만 출연하는 연예인까지 생겨났다.

아파트 광고 역시 그렇다. 세계에서 사람 살 집을 이렇게 호객하듯 광고하는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TV는 아파트 광고에 점령당한 듯하다. 잘나간다는 여배우들은 죄 아파트 브랜드를 하나씩 꿰차고 있다. 중세 유럽 성(城)의 정원 같은 곳을 슬로 비디오로 뛰어다니거나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침실에 스며든 햇살에 예쁜 눈을 찡그리며 배시시 일어난다.

이런 아파트 광고를 대부업체 광고보다 더 못마땅하게 보는 사람도 많다. 대부업체는 개인에게만 피해를 주지만 아파트 광고는 궁극적으로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선의의 피해자들을 양산한다는 생각에서다. 심지어 아파트 광고가 마약 광고보다 더 나쁘다는 주장도 있다. DJ정부에서 대통령 경제수석을 지냈던 김태동 교수 말이다. 그는 최근 낸 책 '문제는 부동산이야, 이 바보들아'에서 연예인들에게 호소한다.

"당신들이 하는 아파트 광고는 마약 광고보다 더 나쁜 겁니다. 소비자들이 광고 메시지에 영향을 받을수록 아파트값은 적정 수준보다 높게 거품이 낄 것입니다. 그만큼 무주택자의 삶을 짓밟고 내 집 마련의 꿈을 빼앗는 것이며 자라나는 신세대까지 노예화하는 극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출연 연예인들이 들으면 소름 돋을 얘기다. 소비자를 현혹하는 과장 광고에 나온 연예인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는 있겠다. 광고가 거품 형성의 한 원인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집값 상승이나 서민경제 파탄의 책임을 광고 출연 연예인에게 돌리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그보다는 우리네 서민금융이나 부동산 정책이 어쩌다 연예인들에게 비난이나 호소하는 것 말고는 달리 대책이 없는 지경에까지 왔는지 참으로 딱하다. 그들이 그만둔다고 뭐가 나아질까. 주거 품질보다 브랜드 이미지에 기대는 건설업체의 장삿속이 먹히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고리대금업이 허용되는 현실에서 광고 출연 희망자들이 왜 줄을 서지 않겠느냔 얘기다. 그들을 상습범이라 비난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보다는 그런 광고가 효과가 없는 환경을 만드는 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해서 푸념 한번 해봤다.

이훈범 논설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