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민주화 … 이젠 경제살리기 나서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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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20년 전 6월 대한민국은 펄펄 끓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에 이어 9일 연세대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국민적 분노가 폭발했다. 이튿날 25만 명의 시민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정권을 규탄했고, 일부는 명동성당에서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6월 항쟁의 도화선이었다. 이후 학생.시민.상인.회사원 등 직업이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권력에 맞섰다. '넥타이 부대'란 말도 생겼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힌 권위주의 정권은 6.29 선언으로 백기를 들었다. 시민이 연출한 감동의 드라마였다. 20년이 흐르는 동안 그 주역들의 모습은 변했다. 하지만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6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다시 만났다. 학생 시위대와 뒤섞여 "호헌철폐" 구호를 외쳤던 젊은 은행원은 40.50대 중년으로 변해 있었다. 성당 시위대에게 빵을 건네줬던 계성여고 학생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어머니가 됐다.

"바로 이 입구에 모여 앉아서 시위를 했지." "여기서 경찰이 검문하면 학생증 보여주고 들어갔었는데." 이들은 당시 명동성당 농성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20년 전 일이지만 어제처럼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책임감과 자부심 느껴=당시 계성여고 2학년생이었던 곽정(37.여.공무원)씨는 명동성당 시위대에 빵과 음료수를 전해줬다. 시위대의 유인물을 몰래 숨겨와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했다. 이과였던 곽씨는 이후 문과로 바꿨다. "100%는 아니지만 6월항쟁 영향이 컸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에서는 역사학을 전공하며 노동문제 서클 활동을 하고 시위도 참가했다. "6월 항쟁은 단순히 하나의 추억거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던져줬어요. 책임감을 갖게 된 거죠."

한일투자금융에 근무했던 정일영(52.삼성증권 부장)씨는 명동성당 앞에서 일어났던 넥타이 부대 시위에 동참했다. 15일 명동성당에서 학생들이 농성을 해산한 뒤에도 퇴근하고 명동성당으로 달려가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그는 "군사정권의 압제를 이겨낸 경험이 내 삶에 큰 자부심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민주주의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그때는 그런 말만 꺼내도 머리털이 꼿꼿이 서는 무서운 시대였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경제와 개인주의가 걱정=하지만 과거보다 어려워진 경제에 대한 한탄도 있었다. 당시 대한보증보험 노조위원장이었던 김국진(56)씨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금융권은 30% 정도 구조조정됐다"며 "외견상으로는 민주주의가 성장했지만 살기는 더 어려워져 걱정"이라고 말했다. 20년 전 전 국민이 하나 되는 뜨거운 열기를 몸소 체험했던 만큼 최근의 개인주의적인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도 토로했다. 계성여고 학생이었던 김정선(37.약사)씨는 "과거보다 시민사회운동의 기반이 갖춰졌지만 오히려 일반 대중의 참가와 호응은 줄어들었다"며 아쉬워했다. 남을우(50.기업인)씨는 "현재의 시위나 집회를 보면 공공의 이익이 아니라 이익집단을 위한 떼법인 것 같아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남씨는 당시 비씨카드에서 근무하며 점심때면 가두행진에 동참했다.

◆운동권 정치인에 비판도=당시 시위를 주도한 재야인사와 총학생회 간부들 중 상당수는 이제 정치권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정부기(51.자영업)씨는 당시 여의도 유화증권에서 근무하면서도 퇴근 뒤에 명동 시위에 참가했다. 정씨는 "사실 항쟁에 열심히 참여했던 사람들은 명동 지역 상인 등 일반 시민이었는데 오히려 정치인들이 6월항쟁에 참여한 것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애란.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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