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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중앙일보 창간27돌…세계석학 특별기고|가부장적 민주주의시대 온다|미 역사학자 후쿠야마 박사|21세기의 이데올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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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미국 역사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박사는 중앙일보창간 27주년 기념 특별기고를 통해 21세기의 신세계질서는 서유럽의 자유민주주의와 동양의 가부장적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89년 후쿠야마박사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한편의 작은 논문으로 전세계 지성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바 있다.
그는 또 공산주의 몰락 이후 서구민주주의 중심의 신세계질서는 회교원리주의나 동유럽 등의 과격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아시아의 가부장적 민주주의 또는 유연한 권위주의 체제의 도전을 받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공동체의식이 결여된 서구민주주의와 보편적 가치추구를 등한시하는 아시아의 가부장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서로를 지양해 나갈 것인가에 21세기 이데올로기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편집자주】
21세기가 다가오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진정한 현대국가가 되기를 추구하는 나라의 지배적인 정치·경제체제로 부상하고 있다. 과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간 이데올로기 대립은 쿠바·한반도 같은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으나 이데올로기 대립이 국제정치의 주축을 이루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렇다면 21세기의 국제적 대립과 분쟁은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 유럽과 미국에서 실험된 「자유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와 아시아의「가부장적 권위주의」라는 새로운 체제간의 경쟁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결론은 아시아에서 베트남과 캄보디아 전쟁이 끝난 이후 전반적으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으며 근대화와 빠른 경제성장에 몰두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아시아가 성공적으로 국제공동체에 편입됐으며「신세계질서」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아시아가 아닌 회교 원리주의·과격한 민족주의를 지목하고 있다.
회교원리주의는 분명히 서유럽 자유민주주의와 대립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최근 몇 년간 알제리·수단 같은 나라들에서 상당한 세력을 얻고 있다. 이라크의 경우에서 보듯 많은 중동국가들은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결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자원도 가지고 있다.
또 빈곤한 중동국가 국민들은 유럽으로 대거 이민, 유럽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
한편 세르비아에서 볼 수 있듯 공산주의의 몰락은 무제한적이고 공격적인 신 민족주의를 촉발했다. 많은 사람들은 보스니아가 새 유럽에서 발생하는 분쟁의 전형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확실히 회교 원리주의와 민족주의는 오늘날의 국제정치에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현상들이 21세기를 지배하는 흐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회교원리주의나 편협한 민족주의는 모두 첨단기술에 토대를 둔 현대적 경제체제를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적 경제체제를 갖출 능력이 21세기 열강이 될 수 있는 필수 요건이다.

<냉전이념대립 끝나>
회교국가들은 이란처럼 현대적 교육을 받지 않은 종교 지도자가 통치하거나 알제리의 경우 집권이 유력시되는 세력이, 경제발전이라는 기본적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해 사회가 큰 위기에 직면해있다.
코란의 신학적 교리에 근거한 사회는 오늘날 크게 번영하고 있는 현대과학의 합리성을 근본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일부 중동국가들은 석유가 가져다준 부 덕택에 현대화된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산업화됐다고 말할 수 없으며 석유가 고갈되면 쇠퇴할 것이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동유럽과 구 소련 지역에서 확산되고 있는 편협한 민족주의는 세계경제의 통합 지향적 추세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민족주의는 신기술과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데 필수적인「지구적 통합」이 줄기차게 강화되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오히려 국경통제를 강화하고, 국내시장을 보호하며, 끊임없는 민족분쟁을 조장하고 있다. 더욱이 잡다한 민족이 뒤섞여 있는 동유럽과 구 소련의 헛된 민족주의는 다른 나라로 확산되지 않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민족분쟁이 계속 가열되겠지만 동유럽과 구 소련에서도 민족주의가 득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대 민족주의의 미래는 유럽공동체(EC)회원국들이 체결한 유럽동맹조약(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대신할,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부유한 문명을 이룩할 수 있는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태동하고 있다. 일본·한국의 경우 서구 의회민주주의가 자리잡았고 태국·대만과 같은 나라들은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지만 아시아 대부분 국가들의 정치체제는 서구민주주의 국가들처럼 개인주의를 지향하지 않고 공동체를 지향하는 점이 두드러진다.
의회제도와 법적 권리보장이 이룩돼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가족공동체에서 출발, 지역·직장·국가전체로 확대되는 복합적인 권위체제에 따라 조직되어 있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에서 비공식적인 권위체제는 공산국가들처럼 경찰력과 압제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으며 가부장적 권위에 바탕을 둔, 평등주의적이라기보다 위계적 체제의 특성을 보이고 있다.
한 세대 또는 두 세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시아 사회는 서구사회처럼 경제적 성숙에 따라 집단적 성향은 퇴색하고 보다 개인주의적 사회로 변모할 것이라는 예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비단 서방전문가들 뿐 아니라 아시아인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최근 아시아 사회가 겪은 경험들은 아시아의 전통적 문화가 고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적합할 뿐 아니라 개인주의적 서구민주주의보다 경제적 효율성이 뛰어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시아국가들은 미국에서처럼 노동자권익을 보호하는 각종 법률이나 행정절차 등 종합적인 제도적 장치를 갖추지 못하고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노동자들과 경영진들은 서로에 대한 의무감을 거의 느끼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동 규율이나 노동에 대한 동기유발·노동윤리 등에 해악을 미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서양 도덕적 차이>
동서양 문명의 차이가 절실히 느껴지는 부분은 도덕적 차원이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미국사회가 현재 위기상황에 처해있으며 이는 공동체의식의 결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미국사회에서의 공동체의식 결여현상은 지난 세대 거의 대부분의 미국인이 체험했던 전통적 가정의 붕괴와 함께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범죄발생률이 계속 높아지고 이웃간 단절 현상이 심화되고 있을 뿐 아니라 노사관계도 적대관계로 치닫고 있다.
공동체의식 결여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서는 실행이 불가능한 고도의 정치적 정책결정은 물론 결정된 정책을 추진하는 것마저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같은 공동체의식의 결여가 빚어낸 대표적 사건이 바로 지난4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흑인폭동이다. 당시 폭동을 목격한 부유층 백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가난한 흑인들과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 별개의 위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미국 내 점증하는 인종간 불신은 미국이라는 공동체가 안고있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정치모형 선택기로>
반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제도를 모방하는데 열심이었던 일본인들은 경이적인 경제부흥을 이룩해낸 이후 제도 모방보다 자신들의 고유 전통과 문화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같은「자각」은 비단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대다수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마찬가지 현상이다. 리광야오 전 싱가포르총리가『유교문화전통에 뿌리를 둔 아시아에는 미국식민주주의보다「유연한」권위주의체제가 적합하다』고 한 대목은 아시아 각국들의 이같은 자각을 웅변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유연한」권위주의 체제가 대안으로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강한 공동체의식은 필연적으로 외부세계에 대해 강한 배타성을 내포하게 마련이다. 일본사회에서 재일 한국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바로 이를 뒷받침하는 단적 예라 할 수 있다.
세계경제 추세는 말레이시아·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을 관광·이민·투자 등에서 끊임없이 개방하도록 유도하고있다
「보편적」가치보다 강력한 집단 아이덴티티에 바탕을 둔 사회가 국제무대에서 광범위한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다. 사실일본이나 기타 아시아국가들이 제시하고 있는 모델이 다른 지역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아시아는 21세기 정치모형을 결정짓는 중요한 갈림길이 될 것이 분명하다. 아시아국가들의 선택은 보다 완벽한 서구화의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에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가미한 신 아시아 모델을 추구할 것인지에 있다 하겠다.
한국은 자신들의 고유 전통에 서구제도를 융화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경제적으로 성공한 국가다. 그러나 한국은 머지 않은 장래에 중대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선택은 미국의 개인주의를 계속 발전시켜나갈 것인가, 아니면 방향을 바꿔 전통적 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동체를 재창출할 것인가로 집약되고 있다. 한국의 이 같은 선택과 다른 아시아국가들의 선택이 다음 세기의 세계정치모형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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