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창간 27돌… 세계 석학 특별 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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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한중수교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국제정치 지도를 뒤바꿔놓은 획기적 대사건이다. 한중수교로 외교적 타격을 입은 북한은 지금까지보다 더 심한 고립노선을 택하거나, 아니면 개혁·개방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북한이 후자를 택할 경우 미국·일본과의 수교 교섭에 박차를 가할 것이 분명하며, 이 같은 대외 개방은 대내적으로 북한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일본의 저명한 국제 정치학자인 가미야 후지 게이오대 명예교수는 한중수교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 수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4대 강국간 세력 판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분석한다. 가미야 교수는 한중 수교에는 주변국들에 여러 가지 이익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반면 그 이면에는 불이익들도 도사리고 있다고 지적, 주변국간 협력과 창조적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편집자 주>
한국과 중국의 국교 수립에 대해 지난해말 필자는 그것이 언제 발표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대부분 식자들은 한중 수교가 결국엔 실현될 것이긴 하지만 아직은 좀 이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한중수교 시기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봤다.
한중수교는 곧 중국이「두개의 조선」을 인정함을 의미한다.「두개의 중국」을 부인해온 중국은 두개의 조선도 인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일방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두 개의 조선은 이미 그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해 가을 남북한유엔동시가입이 실현된 때부터 중국은 한반도에 두개의 조선이 존재함을 공식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중수교와 동시에 대만과의 국교가 단절됨으로써 한국이「하나의 중국」원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을 공식 승인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중, 외교난관 돌파구>
한중수교는 한국이 추진해온 북방외교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는 한방도의 평화와 안정을 추진하는 과정에 있어 중요한 이정표, 다시 말해 한반도 통일이라고 하는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불가결한 도중 하차역인「교차승인」의 한국측 부분이 완성된 것이다.
지난 69년이래 남북한 교차승인 구상을 처음 제창하고, 그후로도 이를 계속 주장해온 필자로선 깊은 감회를 금할 수 없다. 이 구상의 나머지인 북한측 부분, 즉 북한-일본, 북한-미국 국교가 이제 궤도에 오르면 교차승인 구상은 완성된다. 앞으로 북한도 교차 승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북방 정책은 북한의 외교 유연화에 커다란 자극을 준 것이다.
한중수교에 담긴 중국의 생각은 어느 의미에선 한국 이상으로 심각하다. 중국은 현재 국제관계상 어려운 입장에 처해있으며 이 같은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한국과의 국교수립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 지난 89년 6·4천안문사태 이래 미국 등 서방국가들은 중국의 인권문제를 중시, 중국에 대해 극히 엄격하고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아직 완화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둘째,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최근 중국의 군사력 증강·남사군도(스프라틀리군도)에 대한 해군력 행사에 대해 비판을 강화하고 있다.
셋째, 최근 대만이 아프리카·아시아국가들에 대해 전개하고있는 이른바 탄성 외교가 배경정부엔 큰 불안 재료였다.

<체제 깨질까 망설여>
이 같은 외교적 궁지를 타개하기 위해 중국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개선 정책이다. 인도네시아·싱가포르와의 국교정상화, 러시아·인도·몽고 등과의 관계완화, 일본 국왕의 방중, 그리고 한중수교가 그 구체적 성과들이다. 이는 중국과 어느 특정국가 사이의 개별 외교정책이 아니라 중국의 대아시아전략, 더 나아가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봐야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중수교가 일본에 대해 갖는 의미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 우리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언론들이 거의 일치해서 전개하고 있는 이른바 한중제휴론이다. 이는 지극히 감정적인 동시에 한국적 색채가 농후한 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맺은 결과 난데없이 일본이 표적이 되는 상황이 대두하는데 대해선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8월10일자 미국 뉴욕타임스지 사설은『한중 양국이 일본을 고립시키고 일본을 분노하게 하지 않는 정도의 군사동맹 결성까지 나아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상황이 그 같은 방향으로 전개될 경우 그것은 정말로「위험한」일이다.
이 같은「일본 억누르기」구상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형성돼 온 한일 및 일중 우호 관계에 커다란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으며, 그것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국가이익에도 결코 플러스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은 새로운 국제환경에 어떻게 대처할까. 2년 전 한국이 소련과 국교를 맺었을 때 북한은 소련의「배신행위」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이번 한중수교의 경우엔 수교사실이 공표된지 상당시간이 지났으나 평양측은 표면적으로는 평정을 지키고 있다. 이러한 평정은 이번에 북한과 김일성 노선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던가를 반증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중수교 발표 후 북한이 받은 충격을 간접적으로나마 표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8월25일자 북한 로동신문 사설이「인민의 강한 자립정신」과「우리식 사회주의의 불패성」을 강조한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8월25일자 동지가 아시아의 평화 실현에는 남북한 화해와 북한 미국 관계 개선이 불가결」이라는 논설을 게재한 것이다.
한중 국교 수렵으로 국제적 고립이 더욱 심각해진 북한이 그 동안 상당치 유화적이었던 태도에서 돌변하여「우리식」노선을 강화해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고립화 타개를 위해 현실노선으로 전환할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북한은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필자는 결국 북한정권이「마음의 준비」로선 우리식 노선을 부르짖으면서도 구체적 정책으로선 현실노선, 즉 한국·미국· 일본 3자에 대한 접근 정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경제·외교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함은 물론 이제는 군사력에 있어서도 혼자힘으로 북한을 대적할 수 있게됐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될 경우 북한은 앞으로 한반도의 주요 당사자라는 입장을 유지하는 것마저도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것이다. 북한이 이와 같은 위기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노선 전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같은 노선전환이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평양정권이 대외 정책을 현실 노선으로 대폭 전환한다면 그로 인해 촉발되는 국내 체제상 변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 김일성 체제 붕괴, 즉 비김일성화가 촉진되는 운명을 맞는 것은 아닐까 하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현 북한정권에 있어 김일성 체제의 유지·강화, 그리고 그 후계체제의 존속은 최우선 과제다. 그들은 그 동안 김일성 체제가 유지되는 한, 또 김일성 체제의 존속에 보탬이 되는 한 대외·대남정책을 현실화하는 방향을 모색해왔다.
그러나 그 같은 한정적인 대외노선 전환만으로 현재 북한이 당면한 궁경을 벗어날 수 있을까. 대외적 개혁·개방노선으로 단호하고도 과감히 전환하지 않는 한 그 효과는 기대할 수 없을 젓이다.
북한이 대외노선을 대담하게 전환할 경우 이것이 국내체제변혁에까지 비화하는 것은 점점 더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북한이 당면한 대내·외 정책간 모순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한중수교는 북한-일본 국교정상화 교섭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첫째, 평양의 동경 접근 의욕을 강하게 함으로써 북한-일본 국교정상화 교섭에 탄력이 생길 것이다.
둘째, 북한-일본 국교정상화교섭에 대한 한국의 입장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 한국의 태도에는 미묘한 점이 있었다. 즉 겉으로는 북한-일본 국교교섭 진전을 환영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 지나치게 급속치 진전돼 한국이 기대하는 정도를 뛰어넘는 내용으로 실현되는 것은 억누르고 싶은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한중수교라는 새로운 사태전개에 따라 한국은 북한·일본교섭 진전에 대해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염려를 다소나마 거둘 수 있게 됐다.
또 일본으로서도 이 같은 흐름이 더욱 발전, 남북한 교차승인 완성은 물론 북한-일본국교정상화가 진전을 이뤄야한다고 생각한다.

<주변국의 협력 중요>
한편 미국도 기본적으로는 일본과 같은 입장이어서 대북한관계 정상화로 향한 움직임이 기대된다. 이 경우 가장 큰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북한-일본 경우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이다. 이 문제는 평양측이 이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두차례나 받아들인 사실을 감안할 때, 그리고 지난해말「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발표이래 계속되고 있는 남북한 교섭 과정을 볼 때 최종적인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잠정적인 해결에는 머지않아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할 수 있다.
북한-미국간에는 주한미군이라는 오랫동안의 현안이 있으나, 언제까지 주한미군 철수에만 매달리는 북한의 발상은 냉전 시대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언젠가는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쪽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이 되고, 북한은 남북한관계 안정을 위해, 즉 북한에 대한 한국의 압력을 억누르려는 의도에서 주한미군 계속 주둔을 원할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이상과 같은 다각적 분석을 통해 우리는 한중수교가 단순히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국교수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냉전종식후 동북아시아 신질서구축에 있어서도 커다란 의의를 갖는 사건임을 알았다. 다만 한중수교가 가져오는 갖가지 이익들은 이 지역 각국의 협력과 창조적 의욕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또 새롭게 생겨나는 이익들의 이면에는 그것이 유발할지도 모르는 불리의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함께 알아야할 것이다.
▲1927년 일본나고야출생▲49년 동경대 정치학과 졸업▲오사카시립대 교수를 거처 70년부터 게이오대 교수▲91년 게이오대 정년퇴직·명예교수▲91년∼동양영화여학원대 교수▲저서-『조선전쟁』『현대 국제정치의 시각』『전후사가운데의 일미관계』등 다수
일본의 대표적 정치학자로 전후 일본정치학계에서 현대연구의 필요성을 제창하고 국제정치학을 적극 도입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그의 저서『조선전쟁』은 일본에서 한반도 연구의 필독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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