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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터널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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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전투기 조종사나 곡예 비행사가 비행기를 수직으로 급상승시키면 앞쪽 가운데 부분을 제외한 주변부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수가 있다. 이른바 터널시야(Tunnel Vision) 현상이다. 어두운 터널을 빠른 속도로 달리면 터널의 출구만 동그랗게 밝게 보이고 주변은 온통 깜깜해지는 시각효과를 말한다. 망원경처럼 생긴 원통형 기구를 눈에 대고 보면 세상은 원통의 동그라미 크기로 규정된다. 동그라미 밖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니 당연히 판단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의학적으로 터널시야 현상은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 일어날 수 있다. 안질환에 의한 각막 착색이나 손상으로 시야가 축소될 수도 있고, 뇌출혈이나 중추신경계의 산소 중독도 터널시야를 불러올 위험이 있다. 고산증이나 저산소증.편두통이 터널시야 현상을 일으킨다는 보고도 있다. 흔히 경험하는 터널시야는 음주에 의한 것이다. 과도하게 알코올을 섭취하면 눈 근육이 이완되면서 초점을 잘 잡지 못한다. 급기야 대상이 흐려지거나 이중으로 보이며 시야가 가물가물 좁아진다. 극도의 공포나 스트레스, 또는 격렬한 몸싸움도 터널시야 현상을 일으킨다.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느라 주변 상황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터널시야 현상이 나타나면 사고의 위험이 커진다. 비행기 조종이나 자동차 운전, 중장비 조작, 도로 횡단 중에 터널시야 현상을 겪으면 치명적인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심리적인 터널시야 현상도 있다. 한 가지 문제나 원인에 집착해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판단을 그르치는 것이다. 수사관이 범죄를 수사할 때 예단을 하면 거기에 빠져 중요한 단서를 놓치기 쉽다. 자신이 내린 결론에 부합하는 증거만 받아들이고, 어긋나는 증거는 무의식적으로 제쳐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은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심각한 결과를 빚는다. 좋게 말하면 집중력이 높고 끈기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아전인수(我田引水)에 독불장군이 될 우려가 크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벌인 참여정부 평가포럼 특강은 터널시야의 전형을 보여 준다. 스스로 정한 좁은 시야에 자신을 가두고 그 밖의 것은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그가 보는 동그란 세상에선 나만 옳고, 남들은 죄다 틀렸다. 외부의 비판에는 아랑곳없이 모든 사안을 독단적으로 재단하고, 누가 뭐라든 외곬으로 나간다. 터널시야를 가진 운전자가 또 무슨 사고를 낼지 위태롭기만 하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