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 중재 중요성 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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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중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이얀 폴슨(사진) 런던중재법원 원장은 "기업들이 국제중재에서 지지 않으려면 중재 목표부터 명확하게 정하라"고 조언했다.

폴슨 원장은 법무법인 태평양의 국제중재팀 창립 5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29일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런던중재법원(LCIA)은 국제상업회의소(ICC) 산하 국제중재재판소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국제중재기관이다. 중재란 기업이나 개인 간의 분쟁을 법원이 아니라 제3자에게 맡겨 해결하는 제도로 소송보다 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어 기업들이 분쟁 해결을 위해 많이 활용하고 있다.

폴슨 원장은 최근 런던중재법원의 첫 한국인 상임위원(코트 멤버)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의 김갑유 변호사가 선임된 것과 관련, "한국인 상임위원은 벌써 나왔어야 했다"고 했다. 한국 시장의 중요성과 한국 로펌의 요즘 활약상을 감안하면 '만시지탄 (晩時之歎)'이라는 것이다.

그는 '국제중재 소송에서 지지 않는 법(How Not To Lose International Arbitrations)'을 주제로 강연했다. 왜 '중재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중재에서 지지 않는 방법'일까.

그는 "개별사건에서 중재 판정의 의미는 주관적 목표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옳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가 이겨야 한다'가 아니라 '우리에게 잘못이 있더라고 중재를 통하여 책임 범위를 낮출 수 있다면 그 또한 성공'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어, 계약 상대방이 1500만 달러 상당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중재에서 중재 이전에 1000만 달러로 합의하자고 상대방에게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중재에서 판정금액을 500만 달러로 감액하는 판결을 받아냈다면 외형상 중재에서는 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지지 않은 중재라는 것이다.

폴슨 원장은 한국 기업을 위해 중재에서 지지 않는 방법을 이렇게 정리했다. 우선 계약과정부터 중재를 고려해 협상에 임해야 한다. 향후 중재가 발생하면 자기 기업이 공격자가 될지, 방어자가 될지를 미리 예상해 필요한 계약문구와 중재조항을 계약서에 넣어두라는 것이다.

또 목소리만 크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국제중재 과정에서 중재 대리인은 일방적으로 자신들이 옳다는 주장을 무조건 내세우지 말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증거와 자료를 충분히 제시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은 국제중재에 대비해 증거자료 수집을 제대로 못하는 편이다. 태평양 로펌 김갑유 변호사는 "국제중재에서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는 회사 서류나 이메일 관리가 부실한 기업이 너무 많다"고 했다. 실무자부터 사장까지 줄줄이 연명해서 회사 서류에 결재하는 독특한 한국 문화도 문제다.

김 변호사는 "원문 서류는 없고 임원이나 사장이 결재하면서 지시한 내용이 적힌 문서만 있어서 곤란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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