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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家 3代 걸친 경영수업]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경영”

중앙일보

입력

▶이명희 회장이 본격적으로 신세계 경영에 뛰어든 81년. 부친인 이병철 회장과 골프장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당시 이명희 회장의 나이는 39세였다.

이코노미스트
아버지가 도쿄에서 폐암 수술을 받을 때 내가 동행했다. 수술이 끝난 후 아버지께 “수술실에 들어갈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느냐”고 여쭸더니 “니가…”라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셨다. 나는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이명희(64) 신세계그룹 회장이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투병 당시를 회상한 부분이다. 이명희 회장은 이병철 회장의 3남5녀 중 막내인 5녀로 태어났다. 이병철 회장은 해외 출장길이나, 골프장 어디든 이명희 회장을 동행할 정도로 막내딸을 애틋하게 생각했다. 이명희 회장은 사보에 기고한 ‘아버지와 나’라는 글에서 부친의 인간적 모습과 평소 강조해온 경영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냈다. 이 회장은 지금의 신세계를 국내 굴지의 유통 리더로 키운 저력도 아버지 이병철 회장의 가르침이 바탕이었다고 강조했다. 현재 신세계의 키를 쥐고 있는 정용진 부회장의 경영수업도 어머니 이명희 회장, 외할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이명희 회장의 ‘아버지와 나’ 전문을 입수했다.


내가 서른아홉이 됐을 때 신세계에서 일해 볼 것을 권유한 것은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었다. 당시 아버지의 지론은 “여자도 가정에 안주하지 말고 남자 못지않게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고 스스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강요에 나는 현모양처의 꿈을 접고 신세계에서 일을 시작했다. 출근 전날 아버지는 나를 불러 몇 가지 지침을 주셨다.

그 첫 번째가 “서류에 사인하려고 하지 말라,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믿지 못하면 아예 쓰지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였다. 사인하지 말라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맡겼으면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 후 이 지침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 신세계그룹 결재라인에 ‘회장’ 사인난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 후 나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나의 경영방침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전문경영인을 선임하는 데 주력했다. 전문경영인이 보다 큰 책임과 권한을 갖고 내외 환경 변화에 신속히 대응할 수 있어야 남보다 앞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너가 항상 자리를 지키고 앉아,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기업이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굴러가고 진화할 수 있는 체계화된 조직을 갖추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두 번째는 “남의 말을 열심히 들어라, 어린이의 말이라도 경청하라”이다. 말을 많이 하면 실언할 수도 있고, 남의 말을 열심히 들으면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뜻이었다.

세 번째는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하지 말라”이다. 이 말은 표현과 행동을 절제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업무의 중요성을 따져 챙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확실히 구분 지으라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아버지께 처음으로 심하게 꾸중을 들은 것은 25세에 결혼하면서 처음으로 구입한 땅을 이사하면서 팔려고 했을 때였다. 아버지가 “땅을 매각하면 세금이 얼마인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세금 관계에 대해 모른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것도 모르고 땅을 팔려고 한다며 야단을 치셨다. 아버지는 나중에 몇 번이고 “유비무환”을 주지시켰다.

네 번째는 “사람을 나무 기르듯 기르라”고 말씀하셨다. 기업이 곧 사람이며 업(業)을 기획하는 것이 기업이다. 아버지가 평생 인재 개발에 대한 투자를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런 신념 때문이다.

인재 중시해 직접 신입사원 면접

인재를 중시한 아버지는 신입사원 채용 때 직접 면접을 보셨다. 항간에는 아버지가 관상을 본다고 했지만 사실과 다르다. 아버지는 얼굴의 편안함, 눈의 힘, 그리고 태도와 언행을 살폈다. 그러나 항상 만족스러운 인재만을 뽑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좋은 인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서는 사람의 후천적인 교육을 중시하고, 선천적인 능력, 즉 소질은 중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선천적 소질 내지는 능력을 60%, 후천적 교육에 40%의 비중을 두셨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2년 전에는 “능력이 90%, 교육이 10%”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아무나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력할 수 있는 능력도 따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다’는 지론을 가진 분이었다. 실수가 두세 번 반복돼도 혼내지 않는다. 몇 번을 참고, 모른 척하다가도 그 실수가 다섯 번이 되면 나눠서 할 다섯 번의 질책을 한꺼번에 모아서 하셨다.

판단력을 중시하신 아버지는 몇 차례 교육시켜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판단력이 없다고 생각하셨고 또한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과감히 포기하셨다. 필요하면 포기하고 체념도 빠르셨다. 그것이 본인에게 뼈를 깎는 아픔을 수반할지라도 과감하게 결단하고 가차없이 행동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차갑고 냉정한 경영자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따뜻하고 인자한 분이셨다. 막내딸인 나에게는 큰 칭찬이나 큰 꾸지람도 없이 항상 정을 주셨다. 아버지와 15년을 늘 함께했으며, 아침저녁으로 전화통화를 했다. 그때 아버지께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뭐 하노?”였다. 이 말은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였지만 나에게는 “어서 오라”고 하시는 가장 부드러운 말씀이었다.

외부에서 보는 아버지는 강한 사람이었으나 사실 매우 감성적인 분이셨다.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기를 원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일본 현지법인의 비서가 한국에 관광 왔을 때, 아버지는 일본인 비서에게 용돈을 얼마나 줘야 좋을지를 고민했다. 옆에 있는 비서에게 용돈을 얼마나 주는 것이 좋을까 물었을 때, 회장님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답변을 한 비서를 냉정하다고 나무라시는 분이었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은 명확히 구분하셨다. 아버지는 자녀들과 직원들이 이성에 바탕을 둔 풍부한 감성을 지니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감성만 풍부한 것보다는 냉철함과 감성을 함께 지닌 사람을 좋아하셨다. 가족 중에는 감성이 풍부했던 편인 나를 특별히 대해 주셨다.

평소에 시가를 즐기는 애연가셨던 아버지는 76년에 위암, 86년에 폐암 진단을 받고 87년에 돌아가셨다. 76년 아버지가 최초로 위암 판정을 받았을 때 집안의 공기는 무거웠으며 가족들은 차마 아버지께 위로의 말씀도 붙여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곁에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철없이 우는 막내딸에게 아버지는 그간 조사한 수술 의사의 경력에서부터 위암 완치사례, 치료계획 등의 자료를 보여주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분은 암 판정 앞에서도 자신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조사했던 분이다.

아버지가 도쿄에서 수술을 받을 때 내가 동행했다. 수술이 끝나고 난 후 아버지께 수술실에 들어갈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느냐고 여쭤 보았더니 “니가 …”라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셨다. 나는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이 모습이 나중에 ‘이병철 회장이 딸을 안고 울고 있더라’는 소문으로 한동안 그룹 내에서 회자되었다고 들었다.

▶이명희 회장은 항상 부친과 동행한 덕에 본인도 모르게 생각과 행동까지 따라 하게 됐다고 말했다.

“화장지도 반으로 잘라 쓰셨죠”

나는 아버지께 인간적으로 반했고 아버지도 나에게 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모시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실지, 또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 감동을 드릴 수 있을지를 계속 생각하고 실천했다.

주위에서는 냉철하다고 잘못 알고 있기도 했지만 사실 아버지에겐 섬세하면서도 여성적인 면도 있었다. 화려한 넥타이와 핑크색 와이셔츠 입는 것을 즐기셨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핑크색 단추를 달아 화려한 와이셔츠를 만들어 드렸고, 아버지가 쓰는 초라한 만년필에 조그만 액세서리라도 붙여 드리려고 애썼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물질과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편하다.

아버지는 자기 절제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셨다. 취미생활 또한 사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무절제하게 행동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항상 절제된 삶을 추구했고, 낭비도 하지 않으셨다. 방에 필요 없는 전등을 직접 껐으며 화장지도 반을 잘라서 쓰실 정도로 검소한 분이셨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나면 나중에 할 것이 없게 되고, 한도 끝도 없이 하게 되면 허무가 온다”고 하시며 늘 여백의 미를 남겨 두셨다.

현대 경영에서는 CEO의 적정 나이를 50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68세 때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어 73세 때는 64KD램을 개발 생산해 내셨다. 아버지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살아갈 길은 부가가치가 높은 반도체뿐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국민에게 모자라는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하신 것과 같은 이유다.

아버지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려 했을 때 주변 참모들의 반대가 많았다. 당시에는 축적된 기술력도 거의 없는 데다, 막상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제품이 출시될 즈음에는 일본에서 그보다 앞선 차세대 제품을 출하해 가격이 폭락하고 수익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직관력 닮은 이건희 회장

하지만 아버지는 집념과 선견성을 가지고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셨다. 병상에서 암 투병을 하시면서도 반도체 실적을 보고받으셨다. 담당자들을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다. 이 모두가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버지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열은 아버지의 노쇠한 육체를 지켜주는 마지막 힘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와 나는 많이 닮았다. 체질, 성격에서부터 취향·생김새·좋아하는 음식까지 모든 것이 닮았다. 특히 관심 있는 것을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은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맛있는 자장면을 발견하면 일주일 동안 그것만 먹기도 했다.

내가 아버지를 닮게 된 것은 아버지를 가까이 모시면서 나도 모르게 생각과 행동까지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모든 것을 행동으로 표시할 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아버지의 속내를 알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 자신의 행동을 통해 모범을 보이셨고,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우리 형제들은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아버지는 지독한 메모광이셨다. 종이를 빼곡히 채워가며 메모했고, 수십 번도 더 점검하고 확인하며 철두철미하게 일을 관리했다. 미결사항은 메모지에서 지워지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메모하는 습관을 배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우리 형제 중에 가장 많은 수첩을 갖게 됐다.

아버지는 대소완급을 조절할 줄 아는 분이셨다. 모든 일은 계획이 우선이었고 즉흥적인 것은 없었다. 신중하게 결정하지만 일단 결정되면 진행 스피드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다.

아버지는 골프를 무척 즐기셨다. 한솔 이인희 고문이 미국을 다녀와 미국 골프장에서는 스프링클러를 사용해 잔디를 관리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아버지는 안양골프장에 스프링클러 도입을 검토하라며 다음날 바로 미국으로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모든 일을 빠르게만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안양 골프장은 겨울에 서리가 내리면 잔디의 허리가 보인다는 표현을 하실 만큼 잔디에 만족하지 못했다. 어느 날 코스를 돌던 아버지는 14번 그린 근처에서 겨울철에도 힘 있는 반 평 정도 규모의 잔디를 발견했다. 아버지의 표현에 의하면 서리를 맞아도 빳빳하고 허리가 보이지 않는 잔디였다.

이 잔디를 연구하고 번식시켜 골프장 전체에 옮기는 데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6년간 이 잔디가 조금씩 늘어가는 과정을 즐기셨으며 손님들의 불평에도 이를 기다리는 집요함이 있었다. 그 후 그 잔디는 완벽했다.

아버지와 삼성 이건희 회장을 비교한 어느 글을 보니, 아버지는 규칙적·계획적·통제적인 사람이며 이건희 회장은 유연하고 철학적이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없이 관대하다고 했다. 또 아버지는 예리한 직관력을 지녔고 이건희 회장은 동물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가도 곁들여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시간을 잘 지키고 계획된 일정에 따라 철저하게 움직이는 분이셨다. 그런 점에 비하면 이건희 회장은 조금 다른 측면을 지녔다. 그러나 예리한 직관력이나 동물적인 감각은 결국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부하 직원의 행보만 보고도 현장 상황을 파악할 정도로 예리한 직관력의 소유자셨다. 삼성 이 회장도 아버지의 그러한 직관력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지금 신세계, 아버지가 다 만든 것”

요즘도 길을 걷다가 아버지가 즐겨 매셨을 법한 화려한 넥타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멈춰서 옛 생각에 잠기곤 한다. 살아계시는 동안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버지와 통화했고, 거의 매일 어디든 동행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고자 했으며,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고자 했었다. 돌아가신 지 20년이 다 돼가는 요즘에도 아버지를 내 마음속에 품고 산다.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를 어렵게 대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더욱 그립고 애틋한 부녀지간의 정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나는 태산이 무너진 듯 슬픔을 견딜 수가 없어 한때 방황하기도 했다.

이때의 미국 여행이 지금의 이마트를 만든 원동력이 됐다. 환경 변화가 필요해 찾은 곳에서 나는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사실 삼성에서 분리한 이후 신세계는 조선호텔과 백화점만 운영하는 중소기업 규모에 불과했다. 신규 사업을 하기에는 자금과 능력이 부족한 시기였다.

나는 미국에 있으면서 프라이스클럽과 월마트 등 창고형 점포를 보았고, 적은 투자로 가능한 신규 사업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것을 회사에 제안했고 1993년 창동에 최초로 테스트 점포를 연 것이 오늘날 이마트의 시작이다.

신세계는 외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후 프라이스클럽과 제휴해 노하우를 습득했고, 백화점 경영을 통해 얻은 한국 유통 트렌드를 분석해 한국에 맞는 새로운 할인점 업태를 개발할 수 있었다. IMF 때는 프라이스클럽과 카드 부문을 매각해 이를 이마트에 집중 투자키로 한 결정이 현재의 신세계로 성장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됐다.

최근 이마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신세계 경영자들에 대한 평가도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 나는 아버지에게 배운 기준으로 회사 경영자를 선택했으며, 그 사람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었다. 회사를 경영한 것은 내가 아니고 전문경영인이다. 전문경영인을 중용하고 그 사람에게 전권을 맡기지만 결과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묻는 방식은 아버지께 배운 것이다.

신세계는 현자형 오너와 성취형 전문경영인의 궁합이 잘 맞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신세계는 오너가 사업의 큰 틀을 잡으면 구학서 사장(현 부회장)이 실질적인 경영방침을 제시하고 전문경영진이 회사별로 전략을 수행하는 경영방식을 택하고 있다. 신세계의 경영 판단은 전적으로 전문경영인에게 맡겨져 있다.

예를 들어 백화점 사업의 경쟁력이 약해졌을 때 성장 산업인 할인점 시장을 선점해 이를 진두지휘하면서 카드와 프라이스클럽을 팔아 자금과 부지를 확보했던 일도 오너의 경영 방침인 선택과 집중 원칙에 따라 전문경영인이 스스로 판단해 추진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신세계는 아버지가 다 만들어주신 셈이다. 인재를 중요시한 아버지가 우수한 전문경영진을 육성해 놓았고, 나는 그 인재를 선임한 것 외에 별로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신세계는 2012년에는 매출 33조원으로 세계 10대 종합 유통 소매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사업 영역도 현재의 백화점과 할인점뿐 아니라 쇼핑센터, 인터넷 쇼핑, 아웃렛 사업 등에도 진출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요즘 같을 때 떠오르는 아버지 말씀은 “행복할 때 불행을 생각하고, 정상에 올랐을 때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이다. 인간이나 기업 모두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겸허해져야 한다. 주변에서 인정받을수록 스스로를 더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상왕 장보고는 세계와의 교역이 미미했던 시대에도 세계를 품에 안고자 바다를 정복한 사나이였다. 창업의 거장이란 점에서, 또 뜻을 세계 제일에 두었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장보고의 이상과 야망을 닮았다. 아버지는 우리나라에 왜 장보고의 동상이 없는지 늘 궁금해 하셨다. 나는 이런 주제를 우리 회사,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 번 던져주고 고민하게 하고 싶다.

정리= 박미숙 기자(splanet8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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