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투자는 그 사업을 소유하는 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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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23면

가치투자에도 기독교처럼 교리에 충실한 구교(舊敎)와 이를 새롭게 해석한 신교(新敎)가 있다. 구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벤저민 그레이엄 밑에서 일했던 월터 슐로스라면, 신교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빌 밀러를 꼽을 수 있다. 밀러는 자산운용사인 레그 메이슨 밸류 트러스트의 최고경영자(CEO)다.

‘가치투자의 신교도’ 빌 밀러

밀러는 가치투자의 적자인 워런 버핏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IT(정보기술)와 닷컴 주식에 투자해 높은 수익률을 올렸다. 한때 그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종목들은 AOL타임워너, 델 컴퓨터, 아마존닷컴 같은 주식들이었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밀러를 두고 ‘가치투자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성장주에 투자하는 사이비’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중요한 것은 투자 성과다. 그는 성장주 중에서도 가치투자적 요소를 갖춘 종목들을 골라내 장기보유하는 투자전략을 구사했다. 밀러는 1991년부터 2006년까지 무려 15년 연속으로 S&P500지수를 능가하는 전무후무한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는 금세기 최고의 펀드매니저라 불리는 피터 린치를 앞지른 것이다. 더욱 대단한 것은 시장 상황에 따라 자금 입출금이 잦은 공모펀드를 운용하면서 그런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이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는 대학 학부에서 경제학과 유럽지성사를 공부했지만 박사과정에선 철학을 전공했다. 경제학과 법학 등도 훌륭한 학문이지만, 세상의 원리와 사람 사는 이치를 깨닫는 데는 철학이 지름길을 안내해준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요즘도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독서 모임을 갖고 있다. 이들이 공부하는 대표적 분야가 ‘복잡계’다. 밀러는 주식시장을 ‘혼돈으로 가득 찬 질서’로 이해한다. 밀러를 보면 성공 투자를 위해서는 투자론보다 인식론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밀러는 자신의 펀드가 좋은 성과를 거둔 비결에 대해 “사업의 가치에 초점을 맞춰 장기투자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주식투자란 어떤 사업을 소유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주식을 자주 사고팔다 보면 이런 사실을 망각하게 마련이다. 좋은 주식을 골라 끈기 있게 보유하기 위해선 분석능력만으론 부족하다. 나름의 안목과 신념이 필요한데, 밀러는 이를 철학 공부를 통해 확보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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