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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6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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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머리가 아팠다. 이럴 수는 없다고 엄마에게 소리치던 내게, 엄마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 마음 깊은 곳에서, 싫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어투로 천천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 구절을 읽었을 때 무슨 생각 했는지 아니? 뜻밖에도, 화가 치밀었어…. 뭐야!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무슨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다도 아니고, 팔에 골절상을 입었다도 아니고…. 세상에 맙소사 위녕, 그게 사람이니? 그런 과거를 가지고도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좋은 묵상을 하고, 그렇게 보석 같은 잠언집을 내다니! 내가 얼마나 속은 기분이었겠느냔 말이야…. 그런데 나중에 알았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는데 그건 시간이었어. 그 사람이 그 일을 당한 것과 나중에 훌륭한 사막의 은수자가 된 그 사이의 시간. 우리에게는 베일에 싸여 있는…, 그러나 그가 온전히 혼자 견디어야 했을 그 시간."

그 은수자가 누군지 충격이 왔지만 엄마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뭐? 그런 사람도 있으니 나보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고 묻고 싶었지만 나는 잠자코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잭 다니엘 아저씨…, 참 좋은 분이야. 엄마가 돈도 많고 성격도 좋고, 얼굴도 잘생기고 배도 나오지 말고…. 뭐 그런 남자가 좋다고 했지만 그 사람 돈도 별로 없고, 얼굴은 못생기고, 배도 나오고, 그런데… 늘 엄마를 즐겁게 해줘. 엄마가 슬플 때, 엄마가 화를 낼 때, 엄마가 술 먹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울 때도…. 엄마를 웃게 만들어…. 사람이 사는데 유머라는 것이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어. 그건 머리와 마음과 삶 전부를 아우르는 총체적 의미의 여유 같은 걸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위녕. 그 아저씨…, 부인과 두 아들을 모두 제 손으로 묻어야 했었던 사람이야."

나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내가 안고 있는 죽은 코코를 보고 터질 듯이 붉어지던 그의 눈이 생각났다. 코코를 묻을 때 아저씨의 손이 떨리고 있었던 것도 그제야 떠올랐다. 우리를 앞에 두고 아저씨가 왜 말이 없었는지, 우리를 보내놓고 아저씨가 왜 서점의 문을 닫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죽은 코코를 들고 가서 아저씨께 손수 그 정원에 묻어 달라고 말한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는지도 느껴졌다. 내 슬픔 하나를 두고, 그것에 정신이 팔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 채로 우리는 또 얼마나 남의 상처를 헤집는 것일까.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코코를 두고 했던 말이라는 것도 잊고 나는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봐. 런던 특파원으로 있을 때, 온 가족이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적이 드문 빗길이었다지. 흔히 우측 통행을 하는 차선에 익숙한 사람들이 좌측 통행 국가에서 범하기 쉬운 실수가 일어난 거야. 그리고 두 아이와 부인은 죽고 아저씨 혼자 6개월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대…."

엄마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엄마는 그걸 운명이라고 불러…. 위녕, 그걸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그걸 받아들이는 거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큰 파도가 일 때 배가 그 파도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듯이, 마주 서서 가는 거야. 슬퍼해야지. 더 이상 슬퍼할 수 없을 때까지 슬퍼해야지, 원망해야지, 하늘에다 대고,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가 있어요! 하고 소리 질러야지. 목이 쉬어 터질 때까지 소리 질러야지. 하지만 그러고 나서,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실컷 그러고 나서…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말해야 해. 자, 이제 네 차례야, 하고."

그리고 아주 뒷날, 내가 엄마를 다시 떠나게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어떤 작가가 말했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우리의 성장과 행복은 그 반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영어의 responsible이라는 것은 response -able이라는 거야. 우리는 반응하기 전에 잠깐 숨을 한번 들이쉬고 천천히 생각해야 해. 이 일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나는 이 일에 대해 내 의지대로 반응할 자유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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