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장' 토니 블레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시에라리온 내전 종식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달 30일 현지 명예 대추장에 추대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左)가 부족장들의 도움을 받아 대추장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있다.[마헤라(시에라리온) AP=연합뉴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 명예 대추장(honourary paramount chief)에 추대됐다. 임기 만료를 한 달가량 앞두고 아프리카 대륙을 고별 순방하던 도중 시에라리온 내전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같은 명예를 누린 것이다.

BBC방송에 따르면 리비아에 이어 지난달 30일 시에라리온에 도착한 블레어 총리는 수도 프리타운 부근 마헤라 마을에서 20여 명의 전통 부족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명예 대추장 직에 추대받는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로이터 통신은 블레어 총리가 대추장 전용 나무 의자에 앉고 부족장들이 그의 어깨에 대추장임을 나타내는 갈색 겉옷을 걸쳐 주는 추대 의식이 진행됐다고 전했다. 블레어 총리는 그러나 곧이어 겉옷을 벗어 부족장들에게 건네주며 "이 명예로운 옷과 자리는 나보다 여러분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바이 셰보라 은토플라(평화의 추장)'라는 칭호도 선사받았다.

블레어는 시에라리온 국민과 정부의 '은인'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10년 가까이 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시에라리온에 영국군을 파병해 2002년 내전을 종식하고 평화를 정착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현지 주민들은 지금도 그를 '영웅'으로 우러러 보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블레어가 '평화의 추장'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내전 당시 반군은 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거나 팔다리를 잘라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아이들을 납치해 전사로 양성한 뒤 술과 마약을 먹여 잔혹행위를 강요하는 등 시에라리온의 상황은 너무도 암울했다. 이 때문에 유엔조차 필수 구호요원을 제외한 수백 명의 요원에게 긴급 철수 명령을 내렸을 정도다. 시에라리온의 현 대통령 아마드 테잔 카바도 2000년 영국이 개입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카바 대통령은 현재 7월 28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민주적으로 치른 뒤 블레어보다 한 달가량 늦게 권좌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의 최대 민영 신문인 콩코드 타임스는 블레어의 방문을 앞두고 "잊혔던 아프리카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영국 총리의 지대한 공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를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누가 블레어의 뒤를 잇든 간에 우리는 후임 총리가 아프리카 발전을 위해 힘썼던 블레어의 비전을 계승하기를 바란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또 "덕분에 오늘날 시에라리온의 경제와 사회가 회복되는 새 길로 나아가고 있다"며 "우리 국민이 앞으로도 토니 블레어의 유산을 기억하며 살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영국 정부는 지금도 시에라리온 한 해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4000만 파운드(약 732억원)를 지원하고 있다.

박경덕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