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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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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정대철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은 현 정권의 원로다. 그들이 지난해 말 이병완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시내 한 호텔로 불렀다. 좌충우돌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비판하며 "독재를 하자는 것이냐"고 거친 말로 몰아붙였다.

그러고 얼마 뒤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 일을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에게 전하라는 말인데 비서실장이 삼켜버리다니…." 두 사람은 개탄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권력자는 없다. 그럴수록 싫은 소리를 전할 용감한 참모는 사라지고, 언론의 비판은 고깝게 들린다.

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진(秦)의 천하통일을 경축하는 잔치가 열렸다. 신하들이 차례로 시황제의 공덕을 찬양할 때 순우월은 경전을 인용하며 현실을 풍자했다. 승상 이사가 발끈해 진의 역사 이외의 책은 모두 불태우고, 옛 시서(詩書)를 얘기하는 사람은 죽이고, 옛것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일족을 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그에 따랐다. 그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다.

옛날 제왕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소련이 무너진 이후 러시아에서는 200명이 넘는 언론인이 살해됐다. 나폴레옹은 제도적으로 언론을 장악했다. 정론 신문을 4개로 줄이고, 지방신문은 주마다 한 개씩만 허용했다. 히틀러는 좌익계 신문 180개를 폐간하고, 자유주의계 책과 잡지를 불태웠다.

이를 흉내 낸 것이 전두환 정부의 언론통폐합이다. 중앙신문을 6개, 지방신문을 각도에 한 개씩만 남기고 모두 없앴다. 동양방송을 빼앗아 모든 TV를 정부가 장악했다. 언론도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고쳐야 한다. 대신 찬사를 원하는 권력자는 언론 장악에 이용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도 자신을 비판하는 민간 TV를 국영으로 만들어 버렸다. 허가를 갱신해 주지 않는 '합법'적 절차를 이용했다. 민주화 이후 언론탄압은 이렇게 교활해졌다. 세무조사, 소송, 정부 광고, 친여 매체 재정 지원, 기자실 폐쇄, 취재원 접근 차단….

며칠 전 대통령 직속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정수장학회가 강제 헌납된 것이라며 유족에게 돌려주라고 했다. 부산일보와 MBC의 주식을 가진 재단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0년간 이사장을 맡았었다. 차베스보다도 세련되지 못한 권위주의 시절의 과거사다. 그렇다면 그보다 20년이나 뒤인 전두환 시대에 빼앗은 동양방송.동아방송은 어떻게 하려는 걸까. 감탄고토(甘呑苦吐)라면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지 않겠는가.

김진국 논설위원

바로 잡습니다 6월 1일자 31면 분수대 '과거사 뒤집기'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대통령 직속이 아니라 관련 법에 따라 설치된 독립기관이므로 바로잡습니다. 또 약칭은 기존 과거사위원회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올 초부터 '진실화해위원회'로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