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산더미” 자료 요구로 녹초(공무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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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부처별 200∼500건씩… 전직원 밤샘/무지·인기성 질문엔 한심한 생각
추석연휴에 「귀성·귀경전쟁」을 치렀던 공무원들은 또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국정감사전쟁」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해는 대선을 앞둔 시점으로 한준수 전연기군수의 관권선거 폭로,고속전철 이동통신 시비 등까지 겹쳐 국회의원들의 맹폭격이 예상됨에 따라 갑호비상 상태다.
특히 쟁점현안이 걸려있는 내무부·교통부 등은 위기를 모면할 묘수찾기와 국정감사 기간중에 또 다른 폭로성 내용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문단속에도 신경을 써야할 판이어서 추석연휴도 반납한채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아직 국감 일정이 잡히지 않아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즐기고 있지만 일단 일정이 잡혀 부처별로 2백∼5백건에 이르는 의원들의 자료요구가 쏟아지면 정말 눈코 뜰새 없이 바빠 정상업무 중단은 물론 1주일 정도는 퇴근을 포기한채 밤샘작업을 하기 일쑤다. 공무원들 사이에는 소위 「악성자료 요구」로 불리는 것들이 매년 화제가 되고 있다.
교육부의 경우 트럭 3∼4대 분량에 이르는 초·중·고 교원 전원의 이력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설득과 언론의 비난으로 취소된 적이 있고 서울시 교육청도 90년 국감 당시 4만7천5백여개(학생수 2백30만명)의 각급 학교 80년 이후 학급 조정현황을 모두 내놓으라는 주문을 받고 5시간을 사정한 끝에 겨우 취소시켰다.
이같은 황당하고 엄청난 자료요구는 부처마다 비슷해 환경처는 80년 이후 배출시설 설치허가 사본일체(9m 높이분),서울시청은 접수된 민원서류 일체 등의 식이다.
또 내무부의 경우 지방채 현황을 요구,자료가 없다고 설명해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아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환경처에는 한 의원이 무려 1백여 종류의 자료를 요구한 적도 있어 화제가 됐다.
공무원들은 이러한 악성자료 요구의 거의 대부분은 의원들이 소관부처의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서 오는 「무지의 소치」로 분석한다.
심지어 보사부의 경우 『최근 2년간의 보도자료를 제출하라』는 요구까지 있어 『평소 소관부처에 관련된 보도내용도 챙기지 않다가 국감이 임박하자 질문을 준비하기 위한 자료요구』라는 불평을 사기도 했다. 매년 이맘때면 행정부처는 주무부서인 기획관리실을 중심으로 예상 질의·응답을 작성하는 것도 큰 작업. 단골메뉴는 내용만 약간 수정하거나 시기만 고쳐 작성하고 대부분은 언론보도를 참고로 해서 준비한다.
그러나 의원 개인을 통해 들어가는 제보 등으로 인해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와 적중률은 10%를 약간 상회하는 정도. 때문에 각 부처에서는 평소 친분관계에 있는 의원보좌관들에게 질문을 알아내거나 유도하기도 한다.
각 부처가 국감기간중 겪는 어려움 중에는 미처 답변을 준비하기 전에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 나중에 아무리 해명을 해도 만회가 되지 않을 때와 국감 때마다 등장하는 데모대 문제도 끼어있다.
작년 국감때 환경처는 쓰레기매립장 문제로 시끄럽던 화성군 주민 20여명이 기형송아지까지 끌고가 의원들을 만나겠다며 농성을 벌여 곤욕을 치렀다.
국감에 임하는 공무원들 눈에는 밤샘작업으로 준비한 요구자료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조건 『자료가 부실하다』고 호통만 치는 의원이나 표를 의식해 『왜 여성 부시장이 없느냐』라든지,지역구를 의식한 민원성 질문을 하는 의원들은 이제 식상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의원들의 질문이 세련돼 간다는게 중론이다. 업무를 정확히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질문하는 의원들이 늘어 국감장소가 정책토론장이 될때는 『국감 받을만 했고 고생한 보람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손장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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