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쪼들리는 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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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은행들에 '예금 비상'이 걸렸다. 경기회복 조짐이 보이면서 기업 등 대출 수요는 크게 늘고 있는데 '자금줄'인 예금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은행권 전체로 보면 4월 한 달에만 수시입출금식 예금에서 7조원 넘는 자금이 이탈했다. 은행들은 고금리 특판 예금을 잇따라 내놓으며 예금 고객 잡기에 나섰다. HSBC는 연 5%짜리 수시입출금 상품까지 내놓았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지난해는 대출 고객 잡기에 영업력을 집중했지만 올해는 예금 고객 늘리기로 목표가 바뀌었다"며 "그러나 고객이 단 0.01%포인트라도 이자를 더 주는 상품을 선호해 은행간 고금리 경쟁이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해외펀드, CMA는 '돈 풍년', 은행은 '돈 가뭄'=3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해외 주식투자 잔액은 281억300만 달러로 1분기에만 120억 달러(11조원)가 급증했다. 시중에 풀린 돈은 2002년 이후 최고로 많은 수준이다. 이런 풍부한 유동성 덕분에 증시뿐 아니라 각종 금융상품에 돈이 몰리고 있다.

그러나 은행 예금만 예외다. 은행의 저축성 예금(정기예금+수시입출금식 예금)은 지난 연말 이후 4개월 동안 10조원 넘게 줄었다. 개인이나 기업 할 것 없이 저축(은행 예금) 대신 증권사 펀드 등 고수익 고위험 상품을 선호하면서다.

같은 기간 증권사의 자산관리계좌(CMA)는 8조원 이상 늘어 4월 말 현재 16조원을 넘어섰다. 해외펀드(역외펀드 제외) 수탁액도 14조원이 급증, 27조원대를 기록 중이다. 증시 활황에 힘입어 주식형 펀드도 5조원 이상 늘었다. 주식형 펀드의 29일 현재 잔액은 54조7790억원으로 5월에만 3조6000억원 이상이 불었다.

기업은행 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개인 금융자산은 최근 5년 새 연평균 7.5% 증가했지만 은행 예금은 연 4.1%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에 따라 2002년 개인 금융자산 중 54.3%를 차지하던 예금 비중도 절반 아래(47.2%)로 떨어졌다. 기은 경제연구소 신동화 선임연구위원은 "안전자산에서 고수익상품으로 선호도가 옮겨가면서 은행 예금으로 몰리던 자금이 증시 등으로 급속히 이동 중"이라고 말했다.

◆고금리 예금 잇따라 내놓아=증권사 CMA가 올 들어서만 지난해의 두 배 가까운 돈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고금리다. 무이자에 가까운 은행 수시입출금식 예금과 달리 연 4%의 고금리로 고객을 유인했다. 이에 착안한 HSBC의 온라인 수시입출금 예금인 '다이렉트'도 고객 잡기에 성공했다. 연 3.5% 금리를 준다는 소식에 3개월 만에 고객 수는 33%, 수신액은 70%나 늘었다.

HSBC뿐 아니다. 이제 연 5%대 특판 예금은 일상화할 정도로 은행마다 고금리 경쟁에 나서고 있다. 현재 신한은행은 연 5.1%, 외환은행은 연 5.2%짜리 특판 예금을 판매 중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이제는 특판 예금이 아니면 고객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라며 "자금줄 마련을 위한 은행 간 고금리 경쟁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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