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순 청장, 한화 고문과 통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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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경찰청장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경찰에 출두해 조사받던 날 한화 측 인사와 통화를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청장은 29일 "지난달 29일 고교 동창인 한화증권 유시왕 고문과 전화가 걸려와 통화했다"고 밝혔다. 그는 "처음엔 개인적 대화를 나누다가 저쪽에서 김 회장 사건 얘기를 꺼내기에 '네가 낄 일이 아니다'고 면박을 줘 더 이상 얘기를 못 하도록 한 뒤 끊었다"고 해명했다. 지난달 29일 김 회장은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사건 발생 이후 한화 측 관계자를 만나거나 통화한 적이 없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본인 스스로 뒤집은 셈이다.

유 고문도 28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아들 혼사 문제로 이 청장과 잠깐 통화를 했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김 회장 이야기를 잠깐 꺼냈지만, 일체의 청탁은 없었다"고 말했다.

◆ 잇따른 말 바꾸기=이 청장은 이날 "내가 미국 출장 간 동안(지난달 22~29일) 유 고문으로부터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 왔으나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전화를 받거나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 청장은 4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출석해 "이번 사건 발생 이후 한화 측과 단 한 차례도 만나거나 통화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남형수 경찰청 감사관도 25일 감찰 결과 발표에서 "이 청장이 (유 고문과) 통상 1년에 3~4차례 통화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통화가) 없었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 청장의 '말 바꾸기 행진'에 대해 일선 경찰들은 또다시 들끓었다. 사이버경찰청 경찰 전용 게시판엔 "한순간 무너지는 것은 작은 거짓말에서 온다"(곽철영),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위증을 한 것은 곧 국민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으로 심각한 도덕적 해이 현상"(김정원) 등의 글이 올라왔다.

행자위 소속 김재원(한나라당) 의원은 "위증의 법적 요건은 충분하다"며 "실제 고소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위증 혐의로 고소될 경우 검찰 조사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청장이 유 고문과 통화한 사실에 대해 검찰에서 소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 노 대통령, 이 청장 신임 재확인=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이 청장의 거취와 관련해 "임기제 경찰청장의 거취 문제는 의심할 만한 어떤 혐의가 나왔을 때 논의하는 게 순리"라며 "무슨 사건만 생기면 희생양을 요구하는 풍토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마무리 발언을 통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다 사퇴하면 결국 누가 그걸 다 감당할 것이냐"며 이 청장의 용퇴론을 일축했다.

특히 경찰 내부에서 이 청장에게 사퇴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경찰 조직의 내부도 문제"라며 "국민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봉사해야 할 조직이 내부 분파를 만들어서 정책이나 인사 문제에 지나친 집단행동을 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확실한 혐의도 없는데 청장의 거취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신분상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김 회장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 무마.축소 의혹과 관련해 이 청장을 당장 사퇴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이 청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경찰 내부의 움직임을 경고한 것이다.

박명재 행자부 장관도 이날 오후 경찰청을 방문, "조직 일부에서 연고를 바탕으로 한 집단.분파적 행동으로 정책과 인사에 대한 의사를 집단적으로 표출하고 있다"며 "경찰 조직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용납할 수 없는 사태"라고 말했다.

박승희.권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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