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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세계바둑대회의 이상한 차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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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왕 좋은 성적을 내려면 후지쓰배에서 낼 것이지…."

18세의 신예 박영훈5단이 지지난주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자 동료 10대 기사들은 축하와 함께 이런 아쉬움의 말을 건넸다고 한다. 왜? 삼성화재배로는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박5단보다 두살 밑인 송태곤6단은 지난 7월 후지쓰배에서 준우승해 병역 혜택을 받게 됐다. 송6단은 훗날 나이가 차면 4주간의 군사교육만 받고 '한국기원 공익근무요원'으로 편입돼 계속 프로기사 생활을 할 수 있다.

엇비슷한 비중의 국제대회에서 똑같은 성적을 냈지만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까닭은 병역관계법(병역법 제26조 및 병역법시행령 제49조)에 그렇게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바둑의 경우 동양증권배.잉창치배.후지쓰배의 2위 이상 입상자에게만 병역 혜택이 부여된다. 동양증권배는 없어졌고, 잉창치배는 4년마다 개최되니 사실상 노려볼 만한 대회는 일본에서 열리는 후지쓰배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바둑 기사들에게 병역 혜택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1995년 이후부터였다. 당시 병무청은 이창호9단의 재능이 군 생활로 사장돼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자 바둑을 '예술 분야'로 편입시키고, 앞의 3개 기전을 병역 혜택을 볼 수 있는 대회로 못박아놓았다. 그래서 이후 만들어진 삼성화재배.LG배.춘란배 등 한국에서 주최하는 대회들은 해당 사항이 없다.

지난해 월드컵 4강 신화가 창조되자 '태극 전사'들이 마음놓고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이들의 병역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고조됐다. 병무청은 결국 병역관계법을 손질해 '올림픽 동메달 이상' '아시안게임 금메달' 외에 '월드컵 축구 16강 이상'에도 혜택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는 온 나라가 흥분과 감격에 들떠 있을 때였다. 지금에 와서 박영훈5단 한명을 위해 이 같은 '특전'이 베풀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비단 바둑만이 아니다. 병역관계법의 체육.예술 분야 병역 혜택 자격 규정을 보면 불합리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제외한 다른 대회를 철저히 배제했다는 점이다. 스포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이 올림픽 금메달 이상으로 값진 수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선수권 금메달리스트는 아시안게임에서의 흔하디 흔한 우승자들을 뒤로 한 채 혼자 입영 열차에 올라야 한다.

세계 야구의 본산인 메이저리그에서 아무리 눈부시게 활약해도, 세계 골프의 최정상 무대인 미국프로골프협회(PGA)투어에서 아무리 우승을 많이 해도 몇수 아래 무대인 아시안게임 야구나 골프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것만 못하다.

올림픽 하나만 해도 그렇다. 우리나라 스포츠의 종목별 수준으로 볼 때 육상.수영.스키 등에서는 결선에만 진출해도 양궁.태권도.쇼트트랙의 금메달을 능가할 정도로 잘한 것이지만 병역 문제에 관한 한 완전히 뒷방 신세가 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총을 메고 국토를 지키는 대신 탁월한 재능을 꽃피워 국가에 공헌하는 분야가 체육.예술 분야뿐인가 하는 점이다. 나라의 장래에 더 필수적 자원이라 할 인문.과학분야의 어린 영재들이 홀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공평하지도 않은 현재의 법 규정에는 전면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일일이 자격 대상자를 명시하는 대신 이 문제를 전담하는 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어 이 기구의 종합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동균 스포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