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이 없는 10대 소녀들(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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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3일 오후 서울 용산경찰서 형사계 보호실에는 상습 빈집털이 혐의로 잡혀온 김모양(14·서울 흑석동) 등 10대소녀 4명이 철창너머로 뭐가 우스운지 서로 낄낄대며 농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특수절도·야간주거침입·장물취득·폭력 등 나이에 걸맞지 않은 죄명에도 불구,이들은 국민학교·중학교에 다니고 있는 미성년자들.
그러나 봉숭아물을 들인 열손가락,불룩한 가슴,손가락에 두개씩 끼고 있는 반지 등 되바라진 용모와 체격이 얼핏 봐선 도저히 10대초반의 「학생」으로 보기 어려웠다.
김양 등은 국교동창·동네 선후배 사이로 방학동안 유흥비 마련을 위해 두달동안 서울 동자동 일대 영세민촌을 중심으로 빈집에 들어가 15차례에 걸쳐 현금·수표 등 1백80만원어치를 훔친 혐의로 붙들렸다.
조사 결과 「용돈」이 생기면 담배를 사피우고 남자친구들과 오락실·극장·옷가게·식당 등을 돌아다니며 놀러다녔다.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 도박·알콜중독자·계모 등 「문제있는 가정」출신으로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 왔다는 것.
『우리 아빤 항상 누군가랑 돈내기에 정신이 팔려 집에 잘 안들어와요.』
리더격인 이모양(14·여중2·서울 동자동)은 김양에게 『백대를 맞을래 천대를 맞을래』라며 수시로 「상납」을 강요하고 담뱃불로 어깨를 지져 전치 3주의 화상을 입힌 것으로 드러났지만 『난 후배가 갖다준 돈을 받기만 했을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아빤 밤낮 엄마가 밉다고 싸우고 나보다 술을 더 좋아 하는걸요.』
친구 따라 빈집에 두번 따라갔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백모양(13·국교6·서울 남대문로)은 놀랍게도 지난 학기말 시험에서 전교 2등을 차지한 우등생으로 밝혀졌다.
『새벽 1시쯤 빈집털이를 마치고 귀가할 때마다 아빤 술에 취해,엄만 일에 지친채 곯아떨어져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김양은 죄의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당돌한 표정이었다.
연락을 받고 경찰서에 온 이들의 부모는 하나같이 덤덤한 모습으로 『너희들 당분간 여기서 못나간다고 하더라』며 철없는(?) 자식들을 책망하기 바빴다.
『집은 있어도 돌아갈 가정은 없고 눈 가는데마다 유혹이 많은게 탈이죠.』
사건을 맡은 박경배경위(52)는 이들을 가정법원에 송치하고 못내 씁쓸한 표정이었다.<봉화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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