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을에 되살아난 "건필"|원로문인들 창작 활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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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원로문인들의 작품활동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황순원·박두진·김상옥씨 등 해방이전에 등단, 고희를 넘긴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해 가을 문단에 깊이와 기품을 더 해주고 있다. 노환 등으로 4년여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황순원씨(77)는 『현대문학』9월호에 신작시 8편을 쏟아 부으며 건재함을 알렸다.
『가을걷이 끝낸 들판을/내 해거름녘에 거닐 때/그러나 나홀로 내버려두지 않고/항상 곁에 지키고 있는 이가 있다/눈에 보이지 않고/손에 잡히지 않지만/그 이가 누구라는 걸 나는 안다.(「밤늦어」중)
해거름녘, 8편의 시에 죽음이 언듯언듯 비치면서도 그에 대한 초조나 두려움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손에 잡히지 않지만 그 이가 누구란 걸 나는 안다」며 문학·삶을 통해 평생 추구했던 것 등 모든 것을 아우르는 동반으로서 황씨는 죽음을 함께 한다. 나아가 동갑의 「마누라」한테서 애 엄마처럼 젖내가 풍긴다는 또 다른 시구에서 엿보이듯 죽음을 젊음 혹은 신생으로서 맞이하고 있는 듯도 하다. 지훈·목월과 청록파로 40년 시단에 들어서 이제 홀로 남아 물에 깎이고 혹은 저들끼리 부대끼며 영겁의 세월이 만들어 낸 수석 같은 시, 『수석령가』연작에 몰두하고 있는 박두진씨(76)는 뜻밖에도 청록파 특유의 목가적 정서가 흥건한 시를 발표했다.
『손아금을 둥글게/두 손바닥 한데 모은 엄지가락 사이/입김 세게 불어넣어/뻑뻑꾸욱, 뻑꾹,/숲을 향해 불며 불며/어린 날을 살았다./한나절 고향햇볕/금빛 되려 적막한/어릴 그 가슴 설렌/뻑꾹 소리 그 소리/불러도 또 불러도 화답소리/안 오고./어쩔꼬 나 되돌아가 어린 날의 그리움/….』
『문학사상』9월 호에 발표한『뻐꾹새 고향』에서는 기존의 박씨 시를 설명하는 드높은 종교적 경지, 엄숙주의, 강철같은 의지 등을 찾을 수 없다. 강건한 남성시로 일관해온 시세계 뒤에 숨은 박씨의 여성성이 먼먼 회상의 목가를 타고 말할 수 없이 안타갑게 혼을 적시며 울려온다.
39년 등단,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절제된 언어와 가락으로 우리 전통시가인 시조의 품격을 한껏 빛내고 있는 김상옥씨(72)도 신작시조 2편을 『문학사상』9윌호에 발표했다.
『언제 나/꽃 이름처럼/아름다운 가슴이 있어/아무리/재를 뿌려도/해맑은 눈길이 있어/그들은/지금 어딨는지/종적을 찾을 길 없네.』(「종적」전문)
『감동돼 귀신도 곡하게 하겠다』며 평생시조에 매달리면서도「아름다운 가슴」「해맑은 눈길」등 사물의 본질, 그 순수에 다가가기란 얼마나 어려운가를 유연한 언어·가락이면서도 평범한 감상을 허락하지 않는 탱탱한 구조의 시조미학에 담고 있다. 해방 전 등단, 한국문단을 이끌어온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원로 중 김동리씨(79)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2년여 의식불명상태에서 투병중이며 시를 통해 영원·영생을 꿈꾸는 서정주씨(77)는「일제·5공부역」을 반성, 털어 버리고 지난7월 청운의 꿈을 안고 러시아 유학을 떠났다.
한편 해방직후 등단한 원로중 구상(73), 김춘수(70), 정한숙(70 ), 조병화(71)씨 등이 문예지 최근호에 신작시·소설 등을 활발히 발표, 각자의 문학세계를 꾸준히 전착해 들어가며 평생 바쳐도 못 이룰 문학, 그 심오함과 자존으로 후배 문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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