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권정치」눈감아주는 일 국민/안정 바라 자신과 무관할땐 관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정치는 돈드는 것”… 표몰아 「면죄」
『비서가 한 일이라서….』
일본 국회의사당이 있는 동경 나가타초(영전정)에서 유행하는 말이다. 정치자금과 관련된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의원들은 으레 이렇게 둘러댄다. 돈은 비서들이 만지기 때문에 자신은 잘 몰랐으며 사건화해 비로소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들어도 거짓말인 이 말이 일본사회에선 대체로 통한다. 그래서 관련정치인들은 법망을 무사히 빠져나간다.
인연·지연·혈연·학연으로 끈끈히 얽혀있는 유권자들은 그런 정치가를 대개 다음번 선거에서 다시 뽑아준다. 정치인은 유권자들의 심판을 「면죄부」로 삼아 다시 정치일선에 당당히 나선다. 일본에서 계속 반복해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난 88년 미공개 주식을 유명정치인들에게 액면가로 팔아 상당한 이익을 안겨준 리크루트사건이 터졌을때 관련정치인들은 하나같이 관련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검찰수사로 들통나자 『비서가 한 일이라 몰랐다』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당시 총리와 현 총리인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당시 대장상이 모두 그랬다. 그후 거짓말이 탄로나 미야자와대장상이 사임했고 각료들의 사임도 줄을 이어 결국 다케시타 내각은 무너졌다. 다케시타총리의 비서는 자살까지 했다.
검찰수사는 직무와 관련돼 뇌물을 받은 혐의가 짙은 의원과 차관 등 몇명만 구속 또는 기소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마무리 했다.
자민당은 리크루트사건 직후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했으나 90년 중의원 총선에서는 다시 승리했다. 정치평론가들은 89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것은 리크루트사건 때문이라기 보다 소비세 도입이 더 큰 이유라고 분석했다. 물건을 살때마다 3%씩 돈을 더 내야 하는 새로운 세제에 주부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리크루트사건 처럼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이라면 유권자들은 자민당에 등을 돌리지 않으며,90년 총선에서 자민당이 다시 승리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자민당은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대승했다.
스캔들과 관련된 정치인들이 그 순간만 어물쩍 넘기면 다시 살아남게 되는 것은 일본사회의 한 특성처럼 돼있다.
고 사토 에이사쿠(좌등영작) 전총리나 미야자와총리가 좋은 예다. 사토 전총리는 지난 54년 조선의혹사건으로 기소됐다. 그는 당시 자민당간사장으로 수사담당 검찰이 법무상에 구속을 품신했으나 법무상의 「직무권한 발동」으로 간신히 구속을 면했다. 그후 그는 최장수 총리가 됐다.
차기총리로 거명되는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부총리겸 외상이나 오자와 이치로(소택일랑) 전자민당 간사장도 모두 리크루트사로부터 미공개 주식을 양도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총리 물망에 오르고 있는데도 리크루트사건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정치에는 돈이 들게 마련이고 정치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대개 검은 돈과 관련이 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가네마루 신(금환신) 전자민당 부총재가 지난달 27일 도쿄사가와 규빈(동경좌천급편)으로부터 5억엔을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물러나겠다고 기자회견할 때도 그는 유권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본의 정치는 이처럼 외양상 윤리의식마저 마비될 정도로 썩었는데다 국민을 우습게 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안정으로 전후 일본의 번영을 가져온 자민당의 1당지배에 대한 대가다. 자민당은 파벌로 이뤄졌고 파벌유지에는 돈이 든다. 파벌영수의 제1요건은 자금력이다. 그러다 보니 법이 허용하는 이상의 돈이 기업인들로부터 정치가들에게 흘러들어간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체로 이 돈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쓰지 않고 파벌관리나 선거 등에 쓰고 있다. 그래서 일본 국민은 자민당이 부패한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 안정을 위해 계속 자민당을 지지하는 것이다.<동경=이석구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