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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④ 파코미우스를 찾아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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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25면

1 안토니 수도원 수도원 공동식사의 한 전형을 나타내주는 장소. 이곳은 안토니 수도원의 식사 장소로서 고대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우윳빛 강석회암 통돌을 깎아 만든 긴 식탁과 긴 의자가 너무도 깨끗했다. 앞쪽의 설교대와 같은 돌덩이는 식사시간 동안에 헤구멘이 성구를 봉독하는 곳이다. 그들은 성구를 들으며 밥을 먹는데, 밥 그 자체를 하나님의 아가페로 생각했다. 해설자는 루메우스 수사.

안토니가 동굴에서 단식하고 있는 동안 어느 인자한 노승이 빵을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날짐승이 덮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아리따운 여인이 요염하게 유혹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군인이 창을 들고 나타나 찌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채찍으로 그를 휘갈겼는데 거의 죽음의 직전까지 휘몰아가기도 했다. 사탄에 의하여 나타나는 이 모든 환영을 그는 열렬한 기도와 참회의 행동으로 물리쳤다. 안토니의 이러한 고행 과정은 후대 문학과 회화의 끊임없는 주제가 되었다. 특히 중세 후기의 매우 창조적인 성상화가였던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 당대 중세기 독일의 최고의 종교주제 화가였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newald, 1455~1528), 그리고 20세기 독일의 초현실주의 오토마티즘운동의 창시자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의 그림 속에서 그 내면적 고뇌, 그 상징성과 낭만주의적 신비성이 걸출하게 표현되고 있다.

개인수행에서 집단수행으로 옮겨간 초기 기독교

샘물이 솟아나는 오아시스 자리와 그가 수행한 절벽 중턱 바위동굴 사이의 거리는 꽤 멀었다. 해발고도가 301m나 차이가 났다. 험난할 뿐 아니라 도무지 그 사막의 열기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 길을 한 시간 이상 헉헉거리며 올라가면서 안토니가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살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동반한 수도승에게 물었다.
“누가 그를 수발들었습니까? 최소한의 빵과 물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는 혼자서 다 했습니다. 샘과 동굴 사이도 혼자 다녔습니다. 먹을 것도 혼자 다 만들었고요.”
하긴 그 사막에서 그를 보필하기 위해서만 생활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그렇게 고독하게 20년을 살았다(AD 286~305). 그 기나긴 항마성도의 고행을 박차고 하산했을 때 그는 성자로서 추앙받기에 충분했다. 그의 일거일동에는 성스러운 아우라가 감돌았다. 그 뒤로 이 지역은 그를 추앙하고 본받으면서 동굴수행을 감행하는 수도승으로 가득 찼다. 안토니는 건강한 모습으로 장수하다가 105세에 죽었는데(356년 1월 17일), 이 사막에는 자그마치 한 3000여 명의 그의 지도를 받는 토굴수행승들이 있었다고 했다. 아마도 인도 데칸고원 아잔타(Ajanta)의 석굴을 방불케 하는 그러한 광경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남긴 편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주님 안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아는 자는 자신의 시간을 깨닫는다. 자신의 시간을 깨달으면 부질없는 인간의 언설에 동요됨이 없다.”

2 덴데라 덴데라 하토르 신전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는 기독교 성전 건물 폐허. 파코미우스 수도원 전통이 계승된 곳인데 이 유적 자체는 6세기 중엽의 것이다.

안토니의 수행을 본받는 이 수도승들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평신도운동이었으며, 집단적이 아닌 개별적 수행운동이었다는 데 그 큰 특징이 있다. 이러한 극히 개인적인 수행운동을 에레미티즘(eremitism)이라고 부르는데 이 에레미티즘의 배경에는 로마 식민통치의 혈세(血稅)에 시달린 농민 엘리트들의 반체제적인 각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빈한(貧寒), 독신(獨身), 명상(冥想)을 실천하는 이들의 삶은 참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정신을 위협하는 부패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사막의 고독과 열기와 최소한 생존조건에 만족하면서, 자유롭게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나려는 수행의 열정에 헌신했던 것이다. 그리고 AD 4세기에 이르면 이미 기성의 교회들이 제식적 율법주의, 관습화되어 버린 형식적 예배, 그리고 겉치레의 봉사운동으로 이미 영성을 상실해갔다는 사실도 아울러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 단위의 독자적 수행방식은 그 나름대로 문제가 많았다. 그 수행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체크할 수도 없고, 체크할 기준도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간섭 안 받는 개인의 행동은 정신병자를 양산할 수도 있고, 마귀에 씌어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를 성자로 추앙하는 해괴망측한 일도 비일비재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수행의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수도승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효율적인 수행을 하는 것이다. 등산도 홀로 갈 때 그 특유한 즐거움도 있지만, 험난한 등반은 반드시 집단조직과 행동을 요구한다. 계획이 있어야 하고 규율이 있어야 하며, 캡틴의 리더십과 판단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대장-대원 간의 도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공자(孔子)도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라고 말했는데, 명상만 하고 배움의 규율을 등한시하면 엉뚱한 길로 가기 쉽다는 뜻이다.

3 안토니 성화 안토니수도원 교회 오른쪽 벽면. 안토니가 생활한 장소에 그려져 있는 성화. 사진=임진권 기자

개인주의적 에레미티즘에 대비되는 집단주의적 수행방법인 세노비티즘(cenobitism)을 창시한 탁월한 수행자가 바로 파코미우스(Pachomius, c. 290~346)였다. 파코미우스는 안토니보다 한 세대 아래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보다 약간 연상이다. 파코미우스는 바로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공동체적 기독교 수도원의 첫 모델을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도마복음서를 전해준 주역이기 때문에 그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 없이 크다. 게벨 알 타리프의 항아리 속에 묻혀 있던 도마복음서는 바로 파코미우스의 수도원 도서관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코미우스는 내가 여행하고 있는 이 나그함마디 지역 체노보스키온의 콥틱어를 쓰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북아프리카 로마군대의 병정으로 징집당해 끌려나가, 나일강변에 있는 룩소르보다 약간 상류지역인 이스나(Isna)에 주둔하던 중 동료 장병 가운데 콥틱 크리스천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진지함과 신분ㆍ계급을 완전히 해탈해 버린 개방적인 이웃사랑 정신에 감명을 받고, 제대 후 체노보스키온에 귀향하자마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314).

그 후 그는 팔라몬(Palamon)이라는 은둔자를 만나 그의 영적 지도 아래 수도승으로서의 삶을 실천한다. 그런데 그 지역은 이미 안토니의 영향 아래 수없는 에레미티즘의 수도승들이 개인적으로 토굴 속에서 영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파코미우스는 개인적 수도의 한계를 절감하고, 단체적인 규칙생활로써 보다 효율적인 수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념에 이르게 된다. 그는 덴데라(Dendera) 가까운 곳, 나일강 동편의 버려진 동네에 수도원을 짓고 담을 높게 둘러쌓았다. 그는 이곳을 타벤니스(Tabennis)라고 불렀는데(318), 이것이 인류 사상 최초로 본격적으로 시도된 기독교 수도원이다. 의외로 호응이 컸고, 고독하게 방황하던 많은 수도승들이 높은 담 안으로 모여들어 파코미우스의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수도원의 산발적 사례가 그 이전에 이미 타처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파코미우스는 집단수도 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율을 문서로 남겼고, 그 문서가 탁월한 성서 번역자 제롬(Jerome, c. 347~420)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서양의 수도원 제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제롬은 파코미우스가 콥틱어로 쓴 것의 희랍어 역본을 구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파코미우스는 이 규율들은 자기의 임의적 창작이 아니라 한 천사가 지속적으로 나타나 말해주었고 그 천사의 말을 옮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규율집은 성서와 동일한 권위를 갖게 되었고, 수도승들은 누구든지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앵코라이트는 토굴승처럼 혼자 자유롭게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생활하는 반면, 세노바이트는 선방(禪房) 안거승(安居僧)처럼 완벽하게 규정된 공동규율 속에서 평생을 보낸다. 일어나는 시간, 낮에 사는 생활 스케줄, 자는 시간이 모두 결정되어 있으며, 공동기도, 공동식사, 공동경작, 공동복장, 공동 다이어트 규칙, 공동사용이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두에 엄격한 공동매너가 결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수도원에는 수도승들의 영적 지도자가 있어, 헤구멘(hegumen)이라고 불렸다. 헤구멘은 영적 스승일 뿐 아니라, 수도승들이 아무 생각 없이 수도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니까 사판주지(事判住持)와 이판조실(理判祖室)의 양면을 다 구비해야 한다. 파코미우스는 매우 유능한 헤구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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